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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

27. 인천 감목대리구 설정의 배경

by 세포네 2007.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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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인천 감목대리구 설정의 배경

 

 

감목 대리구는 교구의 사목을 공동 활동으로 증진시킬 목적에서 교구 내의 여러 본당들을 하나의 연합으로 결합시킨 지구를 말한다. 그러나 한국 포교지에서는 그 성격을 달리하여 장차 교구를 만들기 위한 첫 준비 단계로 적용되었다.

1958년 10월 서울 대목구에 속하는 황해도 감목대리구에 소속된 인천과 부천 그리고 38선 이남의 도서 지방이 인천 감목대리구로 설정되고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포교를 맡았다. 메리놀회와 한국 교회와의 첫 접촉은 월쉬 총장이 한국 선교의 뜻을 가지고 직접 내한한 1916년이었다. 1922년 평안도의 분할 문제를 건의했던 뮈텔 주교에게 로마포교성성으로부터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평안도의 사목을 관장하도록 했다는 답신이 전해졌다.

이어 1923년 5월 10일 평안도의 포교권을 위임받은 메리놀회가 한국 진출을 시작하였고, 1924년 10월 19일에는 6명의 메리놀 수녀회 수녀들이 신부들을 돕고자 파견되어왔다. 그리하여 1936년까지 30여 명의 메리놀 회원들이 한국에 파견되어 평양 교구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1942년 6월 1일 전원 미국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해방이 되자, 1947년 1월 다시 내한하여 명동성당에 머무르며 교회와 미군정 사이의 여러 가지 주요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한편 8월 12일에는 평양 교구의 초대 교구장이었던 번(Patreck Byrne) 신부가 초대 교황순찰사로 임명됨으로써 대한민국은 교황청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그 후 1951년 1월 의사, 약제사, 간호사, 특수 기술원 등 7명의 메리놀 수녀회 수녀들로 구성된 의료단이 내한하였으며, 신부들도 충청북도를 사목구역으로 청주 대목구의 설정을 가져오는 등 제2의 도약을 시도했다. 

이어 메리놀회에서 미사예물에 의한 경제적 지원을 하면서 인천 지역의 사목이 본격화 되었다. 그런데 인천 감목대리구가 메리놀회에 맡겨진 것은 당시 서울교구장이었던 노기남 주교의 부탁에 의해서였다. 주교는 재력과 사제수의 부족 때문에 청주 대목구의 파디 교구장과 메리놀 회원들에게 인천 지역의 사목도 맡아줄 것을 건의했으나 이미 메리놀회에서 청주 교구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2년 여 동안 다른 수도회들과 교섭해보았지만 적당한 전교회를 찾지 못하여 다시 메리놀회에 부탁을 하자 그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드디어 1958년 12월 초순 페티프런, 버크, 설리반, 모리스 신부의 부임을 시작으로 많은 메리놀 회원들이 새 전교지인 인천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1959년 11월 16일자로 기본스 신부가 인천 지구 감목대리로 임명되어 인천과 부천 지역 등 도서지방의 식량난을 해결하고 황해에 산재한 170여개의 작은 섬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선교의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 아래 사진: `침묵의 교회`가 됐던 1950년에 평양교구장 서리에 취임하는 캐롤 안 몬시뇰이 1937년 안주지방 아이들에게 교리교육을 하는 모습  [사진제공=평양교구 설정 80주년 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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