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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

23. 1955년 송림동 본당 설립

by 세포네 2007. 6. 24.
 

23. 1955년 송림동 본당 설립

한국전쟁의 참화에도 불구하고 인천지역의 교세는 날로 번창하였다. 그러나 인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던 지역에도 본당은 답동 본당 하나 뿐이었다. 임종국 신부는 많은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호응으로 1954년 ‘성당 신축 기성회’를 조직하였고, 이듬해인 1955년 9월 19일 송림동 본당이 인천의 세 번째 본당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송림동 본당의 부지는 한국전쟁 중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의 함포사격으로 20여 동의 집이 불타버린 자리로 판자집들만 있고 정식건물이 없어 성당 짓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또한 당시 송림동과 송현동 일대에는 구교우들이 많았다. 성당 신축 기성회 회원들은 교회 건립을 위한 부지 매입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땅 매입을 서둘렀다. 그러나 비밀이 새어 처음 평당 1,050환에 흥정되던 것이 평당 1,500환에야 매물이 나오게 되었는데, 다행히 헌신적인 교우의 중재로 평당 1,200환에 매입하게 되었다.

 

 

 

1955년 4월 12일 부지 540평에 성전 신축 공사를 시작하고 신자들의 열성적인 협조와 호응으로 5개월만인 9월 11일에 2층 성당을 완공, 노기남 대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축성식에는 내외 귀빈과 천 명 남짓의 신자들이 참석해 새로운 성전의 축성을 기뻐하였다. 이날 노기남 주교는 새 성전에서 634명에게 견진성사를 주기도 하였다. 송림동 본당 성전이 특이했던 점은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가 신자들을 향해 미사를 집전할 수 있도록 성전의 제대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가 신자들을 향해 미사를 봉헌하는 것을 허용하기 약 8~9년 전에 있었던 획기적인 일이었다.

노기남 주교는 답동 본당의 보좌 신부로서 송림동 성당의 건립에 힘썼던 정덕진 신부를 초대 주임신부로 임명하였다. 당시 신자수는 2,451명으로 적지 않은 숫자였다. 정덕진 신부는 교회 행정을 활발하게 하기 위해 각 구역에 회장단을 구성하고, 1년 후에는 본당 첫번째 부인회인 매괴회, 레지오 마리애를 조직하였다. 레지오 마리애는 가장먼저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모후 쁘레시디움(장년 남성), 그 다음으로 매괴의 모후(할머니들), 남녀 혼성 쁘레시디움, 성가대를 중심으로 한 쁘레시디움, 남자 중고등학생·여자 중고등학생 쁘레시디움 등이 있었다. 평신도들의 활발한 활동은 많은 영세자를 배출했다.

 

1958년에는 독일에서 만들어진 종을 축성하였다. 이때 축성한 종은 지금도 송림동 일대를 아름답게 울리며 신자들과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1959년 10월 18일에는 본당 주보인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성모 마리아 상’의 제막식이 있었다.

교구 설정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송림동 본당은 2005년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으며 기념 책자를 발간하고, 성체 조배실 및 스테인드 글라스를 다시 꾸몄다. 스테인드 글라스에서는 복음사가와 성모님의 생애, 예수님의 생애를 그리고 있다.
< 정리:홍보실 / 참고자료:인천교구사, 송림동 성당 반세기>

사진 위) 1959.12.2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성모 마리아 상' 앞에서
아래) 현재 송림동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복음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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