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3월 부평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며 인천의 두 번째 본당으로 탄생하였다. 부평공소는 일제시대 조병창에 근무하던 직원과 노무자들 중 교우들을 위해 1941년 12월 28일 제물포본당(현 답동본당)의 공소로 설정되었고 당시 신자수는 20명 정도에 불과했는데 점차 증가하여 1945년 해방 때에는 50여명을 헤아렸다.
그 뒤 부평공소의 본당승격을 추진한 것은 황해도 연안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김영식(베드로) 신부였다(왼쪽 사진). 김영식 신부는 연백 본당에서 보육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으나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으로 피난한 김영식 신부는 전쟁으로 고아 수가 급증하자 다시 고아원 사업을 시작하기 위하여 부산 피난 시절 미군 부대의 세탁소 일을 도와 기금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2년 3월 노기남 주교의 허락 아래 고아 사업의 후보지로 부평을 선택했는데 이것이 부평본당 설립의 계기가 되었다.
김영식 신부는 홍태섭(마태오) 공소회장과 교세 확장에도 주력하여 1952년 3월 산곡공소와 서곶공소 및 서해안의 도서를 포함하여 부평공소를 부평 본당으로 승격시켰다. 본당 부지로는 전쟁으로 파괴된 박문여중고의 대지 만여 평 중 삼천여평을 노기남 주교와 당시 답동 본당의 주임신부이며 박문여고의 교장이었던 임종국 신부의 양해 아래 이양받았다.
당시 본당 구역 내의 신자수는 현 부평1,2동 구역이 140명, 산곡공소가 117명, 경서 및 백석공소가 84명으로 합 400명 정도였다.
김영식 신부는 성전 건립에 앞서 연백성모원의 고아들과 지역 주민을 위한 의료 시설이 시급하다고 생각해 1954년 9월 22일 병원 설립을 위한 공사를 시작하였고 총 공사비 7,876,000환, 총 건평 138평의 성모자애병원을 완공하였다. 성모자애병원을 설립한 김영식 신부는 곧바로 성전 건립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당시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된 때였기 때문에 신자들이 성전 건축 기금을 거의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김영식 신부는 미 121 후생병원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그 미사 예물을 성전 건립금에 보태는 등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55년 야산이었던 대지를 구입하여 미군 장비를 지원받아 정지(整地)작업을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건축금을 낼 수 없었던 신자들도 노동력을 제공하며 힘껏 노력하였다. 성전은 2층 건물로 설계되었으나 공사비의 부족으로 우선 1층만을 건축하였고 마침내 1957년 건평 약 137평의 성전이 준공되었다.
이처럼 부평본당을 설립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 김영식 신부는 본당 설립과 동시에 고아원 사업과 성모자애병원의 설립, 무료급식소와 같은 구호 사업을 통하여 한국 전쟁 후 생겨난 많은 극빈자들에게 큰 보탬이 되었다. 또한 인천의 두 번째 본당인 부평본당의 설립은 부평지역의 교세를 증가시키며 1961년 인천교구 설정을 위한 커다란 발판이 되었다.
<정리:홍보실 / 참고자료:인천교구사, 부평4동 본당 3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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