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명(名)이 논어 박학어문(博學於文)에서 온 것으로 학문을 널리 배워 도에 이르는 인재를 배출하고자 하는 교육철학에서 비롯하였다는 박문여자중고등학교는 1940년 인천 소화고등여학교로 개교하였다.
설립자 고(故) 석계(石溪) 장석우 선생은(왼쪽사진) 1870년 2월 4일 경기도 강화군에서 출생하여, 젊은 시절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사업에 성공하자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심하였다. 장석우 선생은 젊은이들에게 신문명을 배우게 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 민족의 과제라고 여겼고, 더욱이 여성들에게 배움의 기회가 없음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일제의 교육침략정책이 극에 달하던 시대적인 악조건 속에서도 1940년 4월 27일 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냈다. 하지만 재단 이사장은 일본인으로 하며 설립자는 이사로 하고 학생은 한국인과 일본인을 각각 50%로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었다.
5월 8일 현재의 송림초등학교 자리를 일부 임대하여 개교하였다. 12월 11일 부평동 산림 만 평을 대부받아 교사를 신축하였고 1941년 11월 7일 이전하였다.(현재 경찰 종합학교) 학생들은 모처럼 배움의 터전을 마련하였기에 세태에 아랑곳없이 희망과 기쁨에 넘쳤다. 그러나 당시의 수업은 국어 시간은 한국어가 아니라 일본어 시간, 가사 시간은 군복 만드는 재봉 시간으로 구성되었다. 학교에서 한국말은 전혀 할 수 없었고, 오전에는 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조병창에 동원되어 일을 해야했다. 이렇게 유지되던 수업도 1945년 학교를 야전병원으로 이용하게 되어 항동 가교사로 이전하였다가 8월 15일 해방으로 다시 본교사로 이전했다.
한편 해방 후 일본인 이사장이 자동 사임되자 장석우의 장남 장관순이 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는데 장관순은 뜻한바가 있어 답동본당 주임 임종국 신부에게 학교 인수를 제안하였고,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가 학교를 양도하였다. 이렇게 하여 학교명을 ‘인천 박문 여자 중학교’로 개칭하면서 종교적 성향을 띤 학교로 성장하게 되었다.
1945년 ‘인천 박문여자 중학교’ 초대 교장으로 한공열 신부가 취임했는데, 당시에는 미군이 학교 본관의 대부분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학생들은 후관 일부에서 수업을 받는 불편을 겪어야 했다. 그 후 한국전쟁의 발발로 부산시 보수공원에 가교사를 빌어 피난학교로 운영하다가 9.28 수복으로 답동 3번지 박문초등학교에 개교하여 부산 분교와 이원적 운영을 했다. 1951년 교육법 개정으로 중·고 병설 인가를 받았는데 이때 부평의 본 교사는 경기도 경찰국이 사용중이었으므로 송림동 산 10-15번지에 교사를 신축하였다.
박문여자중고등학교는 당시 혼란스러웠던 사회를 대변하듯 1956년 송림교사 신축 전까지 무려 8번의 이전을 거쳤다. 어렵게 마련한 보금자리에 대한 기쁨은 더욱 컸다.
이후 1959년에서 1962년까지 학교경영을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에 이관하였다가 1962년에서 1975년까지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1975년부터 지금까지는 인천교구 천주교재단으로 국제교육수도회 노틀담수녀회가 운영하고 있다.
‘건강하고 명랑한 여성, 슬기롭고 지혜로운 여성,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여성’ 등을 교육이념으로 설립자 장석우 선생의 뜻을 이어가고 있으며, 학과수업과 함께 학생미사, 피정, 기도 생활을 지도하며 가톨릭 학교로서의 명성을 빛내고 있다. <정리:홍보실 / 참고자료:인천교구사, 박문 5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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