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79위 한국 순교 복자의 은경축을 맞아 한국 천주교회 주교단은 시복 25주년 기념 사업으로 새남터에 순교자 기념탑을 세우고, ‘사회 질서 재건에 대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성명서는 한국 주교단이 발표한 최초의 대 사회적 성명서로,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권위, 공평한 분배 원리, 농촌 문제의 해결과 직접적 노동 공동체의 확립 등 7개 항목으로 교회사적, 민족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성명서를 발표한 해에 국가와 교회 모두에게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국전쟁 발발 전에 이미 북쪽에서는 교회의 수난이 시작되고 있었다. 1949년 5월 덕원교구를 비롯한 각 교구의 성직자들이 체포, 구금되어 총살당하고 교회의 재산이 몰수되고 외국인 선교사의 해외 추방이 계속되었다. 1950년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의 원장수녀인 장점온 수녀 등이 굶어 죽었고, 1950년 6월 24일에는 조인국 신부 등 15명의 한국인 신부가 행방불명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 공산군은 38선을 넘어 남한을 공격하여, 성당을 사무실 혹은 마굿간으로 사용하였고, 신부들은 체포, 총살되는 등, 103일 동안의 공산치하에서 부산, 대구를 제외한 전국에서 수많은 천주교인이 희생당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6시, 당시 서울교구장 비서였던 김철규 신부는 일본 아사이 신문사로부터 38선에서 인민군이 전면전을 일으키고 남진 중이라는데 사실이냐는 문의 전화를 받았다. 이어 8시에는 교황사절 번(Partrick Byrne)주교로부터 인민군이 이미 의정부에까지 이르렀으니 속히 대책을 세우고 모든 교회를 해산할 준비를 갖추라는 언질을 받았다.
인천에 있던 50명 가량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도 북한 공산군이 38선을 넘었음을 알게 되어 외국인 수녀인 아델라 수녀와 필로메나 수녀가 모든 업무를 한국인 수녀들에게 이관하고 미군의 권유로 본국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피신을 하였으나 답동분원의 원장수녀와 다른 두 명의 수녀들은 인천으로 다시 돌아와 그들이 돌보고 있던 많은 고아들과 함께 지냈다. 그때는 이미 박문유치원과 박문초등학교는 해산된 상황이었고 답동본당 수녀들도 고아원에서 함께 지내고 있었다. 인천의 수녀들은 수도복을 벗고 해성병원의 간호원이라 하며 고아들을 돌보고 부상당한 인민군들을 치료해 주며 지냈다.
북한의 점령 아래에 들어간 남한은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전세를 만회하여 서울을 탈환하게 되었다. 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9.15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이때 인천의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으며, 답동본당도 포탄에 맞아 제대 위 지붕이 뚫어지고 성체 난간에 탄흔이 남겨지는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당시 답동본당의 주임이었던 임종국 신부는 본당을 비우게 되어 전쟁 후 3개월간 본당은 주인 없는 빈 집이었다. 많은 성직자, 신학생, 수도자, 교우들은 대구, 부산 등으로 피난을 하였으나 해성병원을 맡고 있던 수녀들은 고아수가 많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였다. 그래서 덕적도에 200명의 고아와 함께 피신하였다가 6개월을 덕적도에서 지내고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다. 6개월 동안 인천 수녀원도 답동성당과 마찬가지로 소실, 파괴되었고, 비품, 서류 등도 분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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