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 설립 이후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와 활동이 요구되던 때에 여성평신도 단체인 ‘성모회’, ‘가톨릭 소년’, ‘가톨릭 청년연합회’의 뒤를 이어 1948년 최초로 인천 가톨릭 학생 중심단체인 ‘용심회’가 발족되면서 인천 가톨릭 학생 활동이 시작되었다.
해방 후 최초로 실시한 평신도 활동은 가톨릭 청년회에서 전재민 구제를 목적으로 1946년 성탄절 명동합창단을 초빙하여 인천 애관극장에서 개최한 전재민 구호 자선 음악회였다. 성황리에 이루어진 이 음악회는 많은 호평을 얻었으며 가톨릭 청년회는 이 음악회를 통해 100,000원의 수익금을 모았다.
이러한 평신도 단체들의 활동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어 전교와 사목에 많은 공헌을 하는 가운데 임종국 신부는 1946년 남자 중학생들을 주축으로 정식 복사단을 조직하였다. 복사단은 1948년 성신 강림 주일에 중학생 10여명을 주축으로 용심회로 탄생하게 되었는데 이는 오늘날 학생활동의 기원이 되었다.
학생들의 활동이 절실하던 이 당시, 첫 학생회였던 용심회는 초대 회장으로 이병해(타대오)를 선출하고 첫 활동으로 성서 판매를 시작하였다. 이후 한국 전쟁으로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상황 속에 용심회는 잠시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2년여 만인 1952년 다시 활동을 재개하였다.
6월 1일 노영택(바오로)을 회장으로 선임하고 그 명칭을 ‘인천 가톨릭 학생회’로 개칭함과 동시에 남녀를 통합하여 여학생들의 학생회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냈다. 인천 가톨릭 학생회는 성서 판매, 자체 회보 [샘물] 발행, 그리고 매주 토요일 성당 청소 등 1962년 Y.C.S.가 창립되기 전까지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본당활동을 하였다.
인천 가톨릭 학생회는 1962년 10월 본당 Y.C.S. 창립으로 이어져 각종 행사의 주관과 강습회, 주일학생 미사의 주관 등 본당내의 활동을 비롯하여 지역대회, 연구대회를 갖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용심회로 시작된 답동본당의 학생 활동은 1987년 Y.C.S.가 해체된 후 초, 중, 고등부 명도회로 규합되어 학생들은 연계성을 갖고 성서공부와 본당활동 등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사진 왼쪽) 1965. 4. 18 답동본당 Y.C.S 횃불 선서식 기념
용심회로 시작된 학생들의 활동은 인천 가톨릭 학생회로, 다시 1962년 Y.C.S 창립으로 이어졌다.
오른쪽) 1978. 1. 9-11 제1차 답동본당 젊은이 동계 피정
동계피정 후 기념촬영. 중앙에 당시 주임을 지냈던 김병상 몬시뇰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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