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

17. 임종국 신부 재임기간, 활발한 평신도들의 활동

by 세포네 2007. 5. 13.

1935년 보좌 신부로 부임하여 노쇠했던 드뇌 신부를 도와 사목하던 임종국 신부가 1937년 제5대 답동본당의 주임신부로 취임하였다. 한국인 주임신부로는 첫 취임이었다. 신자들은 한국인 본당신부에 대한 기대가 컸다.

임종국 신부는 본당 운영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1937년 6월 1일 평신도 단체로는 가장 먼저 성모회를 발족시켰다. 한국 천주교회는 초기 시대에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평신도 사도직 운동을 전개하여 온갖 고난과 박해를 견디며 이 땅에 복음을 심고 키웠다. 그런데 조선교구 설정 이후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이 사목하면서 점차 성직자 중심이 되고 신자들은 미사에 참례하고 성사를 받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개화기부터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에 국권회복운동과 애국계몽적 성격의 교육 운동이 활발히 일어날 때 천주교회의 신자들도 이 운동에 열렬히 참여하면서 평신도들의 목소리를 높여왔다. 교회 내에서의 평신도 사도직 활동은 교리 연구와 전교사업 및 신도들의 친목을 목적으로 전개되었다. 1933년 3월 조선주교단의 교서에 의하여 ‘가톨릭 진행’이란 이름으로 평신도들의 조직적 사도직 활동인 가톨릭 운동이 전개되어 1932년 ‘가톨릭 소년’, 1937년 ‘가톨릭 청년 연합회’, ‘가톨릭 부인회 연합회’가 창립되고 이를 바탕으로 1938년 ‘가톨릭 여자 청년 연합회’가 발족하여 여성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임종국 신부가 ‘성모회’를 가장 먼저 조직한 것은 이런 교회적 상황에서 연유하였다고 할 수 있다. 중년 여교우들이 주축이 된 이 단체는 1971년 해체될 때까지 전교와 본당살림 협조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어 현재의 사목회와 같은 체제를 갖추어 평신도들로 하여금 본당 참여의식을 고취시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을 본당 신부에게만 의존하여 오던 신자들은 새로운 용기를 얻어 본당의 여러 가지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스스로 본당 운영에 적극 앞장서게 되었다. 

차츰 평신도 들의 참여가 늘어나 1938년 1월 23일에는 여교우들로 구성된 소화 데레사회가 조직되었으며 1946년에는 남학생들을 주측으로 정식 복사반이 조직되었고, 1953년에는 예수성심회, 1954년에는 가톨릭 학생회, 1956년 7월에는 성인 남자로만 구성된 성우회가 조직되었다. 이와같이 평신도 단체가 늘어나고 그 활동이 활발해지자 1957년에 임종국 신부는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가고 있던 레지오 마리애를 본당에 창설하였다.  <정리:홍보실, 참고자료:인천교구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