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피난민들 사이에 생겨난 석남동 공소
인천 석남동 지역에 복음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10여명의 교우들이 10평 남짓한 방에서 공소예절을 하면서부터였다.
1961년 교우들은 어려운 생활 형편이었지만 조금씩 힘을 모으고 부평2동 본당의 도움을 받아 흙벽돌을 쌓아 석남공소(현 사랑의 선교원 옆 산비탈)를 설립하였다. 소박하고 아름다웠다는 석남공소는 1961년 1월 13일 부평2동 본당 소속으로 정식 인가되었으며 그 후로 열흘 뒤인 1월 22일에는 이호남 바오로(석남공소 초대 회장)외 5명이 부평2동 본당에서 영세를 받았다. 공소초기에는 10여명 정도가 미사 참례를 하고 주일 헌금이 120원 정도였으나 점점 신자수가 늘어 1년 후인 1962년 공소확장시에는 72명으로 증가하였다.
밀밭과 보리밭을 지닌 10여채의 초가집들 가운데 탄생한 석남공소는 신자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헌신적인 노력으로, 1974년 10월 6일 14년간의 공소 시절을 마감하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주보로 한 석남동 본당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공소시절부터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던 청년회는 다른 본당에서 청년회 운영을 배우러 왔을 정도로 활성화 되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1985년 부임한 문 요셉 신부가 청년단체들(이사야회, 프란치스코회, 레지오회, 가톨릭노동청년회, 교사회 등)을 합하여 ‘청년연합회’를 결성하면서 회원수가 200명까지 증가하였고 신앙체험과 생활수기를 실은 ‘ 가美’라는 잡지를 매달 발행하는 등 석남지역 실정에 잘 맞는 청년사목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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