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연평지역에 신학문을 가져다 준 해성강습소
답동을 중심으로 인천 육지에서 복음화와 사회사업이 활발하게 벌어질 무렵, 인근 섬 지역에서도 처음 복음의 씨가 뿌려지고 교육을 통해 주민 의식이 계발되기 시작했다.
황해도 해주만 앞바다에 위치한 작은 섬 연평도에는 1917년 황해도 해주본당 전응택 바오로가 임야 관리인으로 오면서 복음 전파가 시작되었다.
전응택 바오로는 가족과 함께 연평도에 와 20평의 초가에 공소를 마련하고 초대공소회장이 되어 당시 미신을 숭상하던 연평도의 어민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였다. 1920년 전응택 공소회장의 장남인 전덕규 요한이 입도함으로써 복음화사업과 교육, 문화사업이 활발하게 싹트기 시작했다.
전덕규는 당시 서울 백동에 자리잡고 있던 성 베네딕도 수도회 부설 숭공학교 목공과를 졸업하고 장면박사등과 함께 수도회 입회를 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도회가 서울교구에서 분리 시설된 원산교구를 맡아 덕원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수도회입회를 단념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떠나기전 연평도에 살고 있는 부모에게 인사차 왔다가 연평도 주민이 너무도 현대문화와 동떨어진 상태에 있는 것에 자극을 받아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연평도에 정착하여 주민을 깨우치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2년에는 강재규(베네딕도)와 전덕규(요한)가 협력하여 연평도 개척사업의 하나로 해성강습소를 열고 초대 교장 겸 교사로 활약하여 신학문을 보급하였다. 그 당시에는 노인들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조차도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는 것만이 유일무이한 배움의 길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연평도 지역사회에에서 주민들의 의식을 계발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교육이었다.
이러한 배경아래 전덕규 등은 교육회를 결성하여 신문화운동을 전개했다. 유교적 폐습에 젖어 있던 완고한 노인들과 온갖 미신행위를 숭상하던 어민들에게는 과학적 사고방식을 심어주고, 청소년들에게는 신학문을 배워 새 시대에 적응하는 일꾼이 되자고 계몽하였다. 이렇게 연평도 공소 부설로 생겨난 4년제 사립 초등교육기관인 해성강습소는 공소건물을 교실로 사용하고 교장 겸 선생은 전덕규 한 명 뿐이었다.
후에 해주 본당 교우인 최낙영과 송화에서 부임한 김 선생으로 교사진이 보강되었으며, 그 후 이만호, 김수봉 등 신자들과 장명규, 기응순, 김총순, 김한식, 김가문 등 비신자들이 해성학교 교사로 봉직하였다. 이중 이만호 바오로는 외교인으로 본래 구학방의 훈장이었는데 천주교회에서 신학문을 가르치는 강습소를 개설하자, 훈장을 그만두고 1923년 자기가 가르치던 학생 15명을 데리고 해성강습소에 입학하였다. 이만호는 특별반에서 속성으로 산술과 일어 등의 과목을 이수하고, 해성강습소에서 교편을 잡았고 영세도 하였다.
해성강습소는 1922년부터 1935년 공립학교(연평도 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기 전까지 13년간 연평도 지역사회의 유일한 초등교육기관으로 복음전파와 함께 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정리:홍보실, 참조:인천교구사, 연평성당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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