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천주교회가 세운 최고의 여성 교육기관, 여자기술학교 개교
1892년 르비엘 신부가 12명의 학생을 가진 학교를 답동성당(당시 제물포성당)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교우들이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기에 계속하지 못하였다. 1년 후 비에모 신부는 교우들로부터 다시 학교를 세우라는 재촉을 받았지만 자격을 갖춘 교사가 부족하여 15명의 어린이들이 있었지만 학교를 세우지 못했다.
이처럼 인천의 선교사들은 오랜 동안 여학교를 세우고 싶어 했고 시도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었다. 교사도 부족했지만 당시 한국의 관습상 처녀들은 거의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학교에 다니기 위해 처녀들이 거리를 나다니는 것이 외교인들로 하여금 종교에 대한 불신감을 갖게 할 염려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선교사들은 생각만 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수녀들이 교육을 시작하여 멋진 성공을 거두었다. 수녀들은 의료활동, 성영회 사업에 이어 뮈텔주교와 마라발 신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899년 8월 답동성당에 여자 기술학교를 세워 교육에도 참여했다.
주로 읽기, 쓰기, 바느질 등을 가르쳤는데 30명 정도의 소녀들이 등록했다. 그 중 외교인이 절반이나 되었는데, 그들도 신자학생들과 함께 기도와 교리문답을 배우면서 자연스러운 선교가 이루어졌다. 여자기술학교는 천주교회가 세운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이었다.
한편 이듬해인 1900년에는 김교원과 강준에 의해 인천항 사립박문학교(박문초등학교의 전신)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의 설립자가 일반인으로 되어 있지만 교세 통계표에 수록되어 있고 1909년 교구에서 인수한 것으로 볼 때 처음부터 인천본당에서 시작했지만 설립 여건상 일반인을 설립자로 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시작된 인천에서의 교육활동은 날로 학생수가 늘어나 1903년 인천본당 교세 통계표에는 두 개 학교의 학생수가 60명으로 증가되어 있었다. 또한 1904년에는 영종도에도 학교가 하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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