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김포지역과 관련된 교하의 천주교 교우촌
김포는 서해로 뻗어 있는 반도지역으로 한반도의 중심부를 점하고 있는 경기도의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으로 강 건너 파주군 금촌읍 교하면과 고양군, 남쪽은 서울특별시와 부천시, 서쪽으로 바다 건너 강화군의 강화읍, 북쪽은 한강 건너 개풍군의 임한면, 홍교면에 닿아있다. 이렇게 주변지역과 중요한 관계를 이루는 위치에 있었던 김포지역에는 일찌기 1890년에 형성된 교하지역 교우촌의 영향으로 1897년에 천주교 신자들이 탄생하였다.
1886년 한불조약 이후 종교의 자유가 주어져 교세가 거듭 확장되었다. 당시 서울에는 1882년 설립된 종현 본당(현 명동본당) 하나뿐이었는데,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주교는 남대문밖에 집 한 채를 구입하여 공소를 개설하여 문밖공소라 불렀다. 문밖공소의 신자수는 빠르게 증가하여 1890년경에는 종현본당의 신자수를 넘어섰다. 이렇게 하여 문밖공소는 1891년 11월 9일, 서울대교구의 두 번째 본당인 약현본당으로 설립되었다. 약현본당은 서울 도성 사대문밖의 전 지역을 관할하였는데, 김포지역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김포지역과 관련된 교하의 천주교 교우촌의 기록은 두세 신부의 서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서울에서 60리 되는 곳에 교하라는 고장에 겨우 1년 몇 개월밖에 되지 않은 작은 신자촌이 있었다. 이곳에 대대손손 내려오는 조상들의 위패를 모시는 종손 며느리인 32세 된 한 젊은 과부가 있다. 그녀는 신자가 되고 싶었지만 어떻게 그 신성한 물건에 손을 댈 수 있었겠는가! 사태를 알아차린 한 사람이 서울에서 달려와 며칠 동안 그녀와 의논한 끝에 결국 그녀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런데 놀랍게도 위패 모두가 어느 정해진 날짜에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이 소문이 금방 퍼져 마을 어른들은 흥분해서 야단들이고 친척들이 극도로 노여워하는 소동이 일어났으니, 이를 어찌해야 좋겠는가? 가엾은 여인은 격심하게 퍼부어대는 욕설에 조금도 항거할 수 없어 서울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차츰 시간이 흐르자 어른들의 흥분도 가라앉았고, 서울에서 혹시 앙갚음할 음모라도 꾸미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한 외교인들은 그 여인을 다시 불러들이게 되었다. 그 후로는 더 이상 그 일은 거론되지 않았다.』 -Comple Rendu de la Societe des Missions Etrangeres de Paris,1891-
32세의 젊은 과부는 집안과 친척들의 반대를 이겨내고 교하에 천주교가 수용되는데 기여하였다. 교하가 정식 공소로서 교세통계표에 기록된 것은 두세 신부가 성사집행을 한 이듬해인 1892-1893년의 “약현본당 교세통계표”에서였다. 이후 1899년까지 교하공소에 대한 약현본당신부의 보고에 의하면, 1893년 교하의 신자수는 19명, 그 이듬해에는 25명, 1894년에는 42명을 기록하여 계속적인 신자수 증가를 보여 주었다. 김포에는 1897년에 천주교 신자들이 탄생하였으며, 1901년 7-8명의 영세자가 있었고 40여 가구가 약현본당 두세 신부를 찾아가 천주교 입교의사를 밝혔다. 천주교가 생겨난지 4년만에 40여 가구가 입교 의사를 나타냈다는 것은 그만큼 천주교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김포지역 교세는 빠르게 확장되어 1917년 통계표에는 김포지역에 오류리, 걸포리, 홍도평, 가양리, 누산리 등 5개의 공소가 있었다. 이중 걸포리 공소가 1946년 11월 걸포리본당(현 김포본당)으로 승격되었다.
● 정리:홍보실 ● 참고자료:김포성당 52년사
사진) 왼쪽부터
1. 1910년대 걸포리공소 교우들
2. 1955-60년 김포 본당
3. 누산리 공소 신자들과 제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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