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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가톨릭 소식들

평양교구 설정 80돌 기획-중화, 관후리본당(중)

by 세포네 2007. 2. 19.

 중화본당 : 신자 660명, 공소 9곳, 신심단체 5개, 사제 1명, 성심학원 및 성심유치원, 본당 출신 성직자 4명(1949년 현황).

 관후리본당 : 신자 2231명, 전교사 5명, 사제 2명, 신심단체 7개, 사회복지시설 및 학교 5곳, 공소 3곳, 본당 출신 성직자 7명(1936년 현황).

 신앙의 종소리가 끊긴 지 50여년이 지난 현재로 봐도 평양교구 두 본당 공동체 교세는 만만찮다.

 당시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린 평양의 그리스도교 복음화 양상을 잘 보여주는 대목. 가톨릭교회는 당시 교육사업과 사회복지활동을 통해 한창 선교 기반을 다져나가는 터였다. 하지만 분단과 전쟁은 '순교'를 낳았고 교회공동체에 '침묵'을 강요했다.

 "성모님, 왜 보고만 계십니까? 지금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고 언제 도와주시렵니까?"

 1949년 12월 관후리본당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사제 서운석(보니파시오, 1922~1949?) 보좌 신부를 체포하러 정치보위부원들이 들이닥쳤을 때, 본당 신자인 오 수산나씨가 외친 통곡 같은 기도소리가 새삼 귓전을 울린다. 사진제공=메리놀외방전교회, 평양교구 설정 80주년 준비위원회  

전대식 기자  오세택 기자

[평양 가톨릭 소년군 '인기']

 평양교구에선 1932년 '평양 가톨릭 소년군'을 출범한다. 현재의 '보이 스카우트'. 평양 가톨릭소년군은 창단 이후 열심히 훈련을 했으며 1933년 여름방학 때에는 최삼준(프란치스코) 단장의 인솔로 악기와 천막을 짊어지고 걸어서, 혹은 기차로 중화ㆍ서포ㆍ순안ㆍ숙천ㆍ강서ㆍ마산ㆍ남포 본당 등을 돌며 관악 연주와 함께 소년극을 공연했다. 가는 곳마다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어떤 지방에서는 수천명 관중들이 몰려들어 경찰이 장내 정리를 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1933년 예수승천대축일에 찍은 사진. 앞줄 왼쪽 두 번째부터 홍용호 신부, 원 하드리아노(당시 서울대목구장) 주교, 모리스 몬시뇰, 김성학(당시 서울대목구 소속) 신부, 코노스 신부, 평양교구 첫 신학생이자 첫 사제인 양기섭 신부가 차례로 앉아 있다.


[중화본당 회장단과 사제들]

 1930년대 중화본당 공동체 회장단과 사제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관점(가브리엘) 중화본당 총회장, 윤승하(미카엘, 평양교구 신우회원인 윤갑열 가브리엘씨 부친으로 총회장을 지냄), 고인덕(인노첸시오, 고원익 마티아 평양교구 신우회장 부친으로 총회장을 지냄), 김용현(비오) 본당 청년회장, 이은호, 레이몬드 수사, 2대 주임 발터 J. 콜만 신부. 3대 주임 조셉 P. 기본스 신부, 중화본당 2대, 3대 주임 사제가 한꺼번에 등장하는 것으로 미뤄 두 사제가 이ㆍ취임하는 1935년 3월께 사진으로 보여진다. 월남한 김관점 총회장(68년 타계)과 김용현 청년회장(86년 타계)은 각각 김광혁(청주교구 수곡동본당 주임) 신부의 조부, 부친이다.

[1935년 중화본당 신자들]

 1935년 7월께 촬영된 사진. 1934년 11월29일 봉헌된 연건평 64평, 500석 규모 중화성당을 배경으로 앞에는 본당 4대(1935.7~39.1) 주임으로 사목한 강영걸(왼쪽) 신부와 메리놀외방전교회원 기본스 신부가 앉아 있고, 그 뒤로 본당 어린이들과 남녀 어른들이 함께하고 있다. 6ㆍ25전쟁 전에 월남한 중화본당 출신 평양교구 신우회원 윤갑열(가브리엘, 89)씨는 "메리놀회 신부님들 덕분에 최근에야 국내에 입수된 평양교구 사진 가운데서 부모님과 생이별한 지 50여년만에 두분 사진 한 장을 겨우 구할 수 있었다"며 깊은 감회를 토로했다.

[성모보통학교 학생들]

 평양교구 관후리주교좌성당에서 기도를 바친 뒤 성당을 나와 평양 상수구리 학교로 향하는 성모보통학교 학생들. 줄을 맞춰 두 줄로 얌전하게 걸어가는 아이들 표정이 천진난만하다. 맨앞 인솔자는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소속 마리아 수녀로 기록돼 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인 수도회로 평양에서 출발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수녀들에게 모든 교육ㆍ자선사업 사무를 인계하고 1940년 7월30일 서울 본원으로 돌아가기 1년 전인 1939년 6월에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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