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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가톨릭 소식들

평양교구 설정 80돌 기획- 중화, 관후리본당(상)

by 세포네 2007. 2. 19.

평안도 지방 복음화 못자리

 

 "어떠한 그리움이 이다지 간절하랴/내 고향 우리 성당 그 목자 그 교우들/세월은 가고 또 가도 눈앞에 삼삼하다."(구상 시인의 '가시밭 그 발자취' 일부)

 '한반도 복음화의 길목' 평양교구. 그러면서도 19세기 중반이 다 돼서야 1856년 뒤늦게 선교가 이뤄진 평양교구는 순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교회다. 병인박해 때인 1866년 2월 평양감영에서 300대의 곤장을 맞고 숨을 거둔 성 유정률(베드로)을 비롯해 숱한 순교자를 낸 평양교구는 1950년 한국전쟁을 전후, 이름이 밝혀진 26위 성직ㆍ수도자, 평신도 등 많은 순교자를 냈고, 지금도 그 순교의 맥은 끊이지 않고 흐른다.

 목재리공소(중화본당 관할)가 바로 평양교구 복음화의 못자리다. 평양 교외 남동쪽 동명왕릉 가는 길목에 있는 목재리공소는 가톨릭교회가 평안도에 진출하는 데 관문 구실을 했다. 특히 목재리공소는 병인박해 당시 혹형을 당해 순교한 윤 베드로, 이 마태오, 윤 바오로의 출생지였으며, 평안도에 진리의 등불을 밝힌 윤창혁(비오)의 고향이었다. 그 목재리공소를 관할하는 중화본당은 1927년 9월 설립돼 22년간 지역 복음화의 등불이 됐다.

 목재리공소가 평안도 복음화의 못자리라면, 관후리주교좌본당은 평양교구의 첫 본당이다. 올해로 본당 설정 111주년을 맞는 관후리본당은 이제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1898년 착공, 1900년 준공된 평양성당은 1944년 일제에 강제 징발돼 헐렸고, 해방 이후 1946년 3월 평양시 인민위원회에서 성당터와 일제가 헐다 만 사제관을 인수, 대성당을 건립했지만 이 성당 역시 1949년 12월 몰수당했다. 1950년 10월21일 평양 탈환 때 강현홍 신부와 장선흥 신부가 평양에 돌아와 일시 성당 복구를 서두르기도 했지만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침묵의 교회'가 됐다. 이에 1920~40년대 중화본당과 관후리본당의 옛 정취와 발자취를 3회에 걸쳐 돌아본다.  


[박해시대 유물]

 1937년 7월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하명월리 뒷산에서 발견된 묵주와 성패, 십자고상, 손으로 쓴 천주가사 '경세가(警世歌)' 일부, 목판본 축일표 일부.<위> 흙장난을 하던 어린이들의 제보로 이를 발견한 강영걸(1935. 7~1939. 1, 중화본당 4대 주임) 신부는 이들 성물과 유물이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중화지방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질 때 묻어놓은 유물로 확인한 바 있으며, 강 신부는 당시 성물을 발견한 장소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아래>

[주님공현대축일 삼왕놀이]

 서방교회에선 전통적으로 주님 공현 대축일(매년 1월6일, 한국교회에선 사목 편의에 따라 1월2~8일 사이 주일에 지냄)을 동방박사의 축제로 지낸다. 이에 따라 삼왕단 행사를 가져왔는데, 한국천주교회에선 최근 교황청어린이전교회 소속 어린이 순례선교단이나 일부 본당에서 삼왕놀이를 하기는 하지만 흔치 않다. 그러나 평양교구 관후리본당에선 1940년대에 삼왕놀이를 즐겼다. 왕관 모양 관을 쓰고 삼왕으로 분장한 어린이들(왼쪽 네 번째부터 여섯 번째까지)이 제각기 황금과 유향, 몰약을 상징하는 예물을 들고 서있고, 그 옆에 시종으로 분장한 아이들이 들러리를 섰다. 이들은 캐럴을 부르며 성당을 방문하거나 신자들 집을 찾아 사탕을 얻곤했다. 1939~1940년 4월 관후리본당 보좌였던 달리 신부가 1940년에 촬영한 사진.

[관후리본당 교리 '경쟁' 대회 우승]

 1937년 9월26일 평양교구 제3회 교리경쟁(경시)대회에서 우승한 뒤 기념촬영을 하는 관후리(당시 평양)본당 신자들. 손에 상장을 들고 부상으로 받은 듯한 괘종시계(오른쪽 아래), 놋화로, 놋대야 등이 눈에 띈다. 빨마가지를 든 여성 순교자를 그린 깃발과 우승기 2개도 등장한다. 당시 교구에서 발행하던 월간 「가톨릭 조선」 10월호에 따르면, 교구 각 본당에서 50여명이 대표로 참가해 성모보통학교에서 필기시험을 치르고 수백명 군중 앞에서 확성기로 문답하는 구술시험을 치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당시 관후리본당에선 최창우(요셉, 남자 대인부 1등), 강안나(여자 대인부 3등), 한윤옥(코로나, 소년소녀부 2등), 김성덕(마르타, 유년부 1등), 최보경(루치아, 유년부 2등) 등이 입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사진 맨 뒤쪽에는 훗날 교구장 주교에 착좌하는 홍용호(왼쪽에서 세 번째) 신부, 관후리본당 7대 주임 조셉 W. 코너스 신부(1933. 10~1938. 3, 왼쪽에서 네 번째) 등 성직자들 얼굴이 보인다.

[성모보통학교 졸업식]

 1933년 8월 성모보통학교 졸업사진. 본당 주보 성 미카엘 대천사상이 성당 전면부에 자리한 관후리성당을 배경으로 왼쪽에는 남학생, 오른쪽에는 여학생으로 나눠 졸업사진을 찍고 있다. 남학생석 아래 가운데 쪽으로 사제단이 자리하고 있다. 사제단은 왼쪽부터 강영걸 신부, 홍용호(후일 평양교구장 주교) 신부, 기본스 신부, 모리스 몬시뇰, 코노스 신부 등. 1929년 3월 기명학교와 성모여학교을 병합, 6년제 보통학교로 출발한 성모보통학교는 1936년 10월 상수구리에 신축교사를 준공하며 관후리 옛 교사에서 이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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