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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

5. 병인박해 순교자 처형지 ‘제물진두’

by 세포네 2007. 2. 17.

5. 병인박해 순교자 처형지 ‘제물진두’

인천의 순교터로는 강화 갑곶진두와 진무영을 꼽을 수 있다. 이곳에서는 병인박해 중에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갑곶진두), 최인서, 장치선, 박서방, 조서방(진무영) 등이 참수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인천에는 이보다 더 많은 순교자가 처형된, 잘 알려지지 않은 또다른 순교터인 ‘제물진두’가 있다.

문서상으로도 병인박해 때 제물진두에서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다고 쓰여 있으나 정확한 위치가 고증되지 않았다.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 부위원장 김진용(마티아)는 제물진두 순교자에 대한 관변측 사료와 교회측 사료, 박순집 증언록, 제물진두의 위치가 명시된 인천부 고지도 및 현 위치도 등 많은 문서와 증언을 연구하여 2005년 4월 제물진두의 위치가 인천 중구 항동 1가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부근임을 발표하였다. 다음은 그의 연구 결과 중 일부 내용이다.

『병인박해 중에 처형된 천주교 신자 9명의 처형지인 제물진두는 제물포항(제물진:제물포 나루터)의 출입구 부근이며, 제물포항의 출입구는, 1957년 이래 중구 항동 1가에서 거주하고 있으면서 인천항이 연안부두로 옮겨갈 때까지 직접 목격해 온 유광준씨의 증언과, 중구에서 발행한 ‘인천 중구의 옛 풍물 책 92쪽’에 있는 제물포항 화면에 나타난 출입구 부두 화면 등으로 볼 때, 순교지 제물진두의 위치는 현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남서방향 약 50m 지점이라고 확신한다.』

병인박해 때 제물진두에서 처형된 순교자는 다음과 같다. 1868년 4월 20일, 손 베드로 넓적이(박순집의 이모부), 김씨(손 베드로의 부인, 박순집의 이모), 백치문(사도 요한, 손베드로의 사위)은 포졸에게 잡혀 도끼로 순교하였다. 1871년 5월 6일에는 이승훈의 증손자인 이연구(兄), 이균구(弟)가 순교했다. 이들은 장차 미함(美艦)으로 들어가 미함을 끌어들이려 했다는 죄목으로 효수경중(梟首警衆, 목을 잘라 매달아 대중에게 경각심을 줌) 되었다. 1871년 5월 18일에는 정씨(이승훈의 손부이며, 이신규의 자부이자 이재겸의 부인), 이명현(정씨의 손자), 백용석, 김아지(김애기) 또한 사학죄인으로 이곳에서 효수경중 되었다. 이와 같이 제물포 제물진두(祭物津頭)에서는 천주교 신자 9명이 처형되었다.

정리:홍보실 
참고자료:(1)인천교구 30년사, (2)‘병인박해 중 천주교 신자 처형지 제물포 제물진두 위치 소고’(김진용 마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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