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올려봅니다~~~
오늘 첫째 독서는 욥기로 가장 고통받은 사람의 대표입니다.
그의 고통은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치는 고통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고통이 차례로 오는데 첫 번째는 그의 소와 나귀들이 약탈당하고
그의 머슴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양 떼와 머슴들이 벼락을 맞아 죽임을 당하였으며, 세 번째도
그의 낙타와 머슴들이 칼데아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정도만 해도 견딜 수 없는데 욥은 더 나아가서
아들딸들이 돌풍에 집이 무너져 한꺼번에 죽임을 당하는 참변을 당합니다.
돌풍에 의한 거라면 사람에 의한 게 아니니 하느님께서 죽이신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고 그래서 욥도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라는 그 유명한 말을 남기지요.
이 정도만 돼도 얼마나 대단합니까?
우리 입, 아니 저의 입에서는 이런 찬미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입에서도 몸에 종기나 나 밤낮으로 괴롭히니
신음이 나오고 마침내 절망의 소리가 나옵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욥에게 친구들이 찾아와 위로를 하는 것인지, 훈계를 하는 건지,
또는 책망을 하는 건지, 아무튼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는데
이 말들이 실은 다 아무 위로가 되지 못하고 염장을 지르는 말들입니다.
이에 비해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욥과 같은 병자들을 치유해주시는
얘기인데 말하자면 병자들은 예수님 시대의 욥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저는 오늘 주제를 <욥에게 예수님이>로 잡았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욥에게 어떻게 하셨을까? 이것이 주제인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론 찾아오는 욥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맞이하시는
분이시기도 하지만,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먼저 다가가실 겁니다
그러나 욥을 찾은 친구들과는 다르게 다가가십니다.
친구들은 귀와 마음을 가지고 가지 않고 입만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이 말하는 사정을 들을 귀를 가지고 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고통학 강의를 할 필요는 없고 그저 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아픔을 들어주고 얼마나 아픈지 공감해주는 것뿐입니다.
그러기에 환자의 고통을 충분히 들어주고 공감해주기 전에는 고통의
원인이나 이유를 의학적으로 얘기하는 것도 삼가야 하는데 신학적으로
고통의 이유와 원인을 설명하는 것, 그러니까 네가 잘못 살아서 그런
거라거나 죄를 하느님께서 벌하신 거라고 얘기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혹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자기의 고통이 죄의 벌인지 또는 하느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는지 혼란스러워할 때 말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때일지라도 말로 그것을 다 설명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대신하는 나의 사랑을 느끼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시몬의 장모에게 다가가시어 묵묵히 그러니까
아무 말씀 하지 않으시고 병자의 손을 잡아주시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다가가시는 분이시고,
시몬의 장모에게 다가가시기 위해 실은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능력의 주님이시기에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지만
모든 병자를 고쳐주신 건 아니며 다만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당하심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느끼게 되길 바라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임마누엘 주님께서 우리의 고통에 함께 계심을
느끼는 나날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 신부 -
'[마음의 정원] >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아지는 삶 (0) | 2024.04.15 |
---|---|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0) | 2022.04.24 |
성소를 살아가는 사람들 (0) | 2021.01.17 |
다 지나가는 것 (0) | 2020.12.30 |
주님의 귀환과 우리 의식의 귀환 (0) | 2020.11.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