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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

침묵의 교회, 북한

by 세포네 2010.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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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먼저 화해하고 일치해야 '통일 꿈' 이뤄

 

김 추기경이 북한 식량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우리민족서로돕기 모금 만찬에서 옥수수 죽을 떠먹고 있다.(1997년 4월 12일)

  과거 북한 문제 때문에 나라가 시끄러울 때면 이런 농담을 하곤 했다.

 "제 책임이 커요. 제가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평양에 사는 김일성 주석은 저의 '어린 양'입니다. 목자로서 양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탓에…."

 우스갯소리지만 목자로서 북한교회에 대한 미련을 떨쳐본 적이 없다. 지금도 아쉬운 점은 내게 맡겨진 사목지 평양을 한번도 가보지 못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고 싶다. 어딘가에 숨어서 반세기 넘도록 신앙을 지켜온 신자들을 찾고 싶다. 단 몇 명이라도 좋다. 그들이 나타나면 꼭 껴안고 어깨를 두드려 주리라.

 번번이 무산되기는 했으나 그동안 몇차례 방북 기회가 있었다.

 첫 기회는 장익 주교가 바티칸 대표단 일원으로 평양에서 열린 비동맹국가 각료회의(1987년)에 다녀온 뒤에 찾아왔다. 그 회의만 해도 바티칸에서 참석 타당성에 대한 의견을 내게 물어왔을 때 "무조건 가야 한다"고 해서 가게 된 것이다.

   그때 장 주교가 내 앞으로 보내는 북측 초청장을 갖고 돌아왔다. 정부 당국은 그 초청건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장 주교와 정의철 신부가 방문 일정을 협의하기 위해 평양에 갔는데 그쪽에서 막판에 난색을 표명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됐다.

 당시 장 주교는 "평양에서 신자라고 밝히는 사람들을 여러명 만났지만 그들을 모두 신자라고 믿기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그러나 ○○○, ○○○는 틀림없는 신자같다"고 보고했다.

 방북 얘기가 나오면 북한에서는 나를 여러번 초청했다고 하는데 정식으로 초청장을 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남측 종교문화계 인사들을 대거 초청하는 명단에 내 이름이 끼어 있었지만 사목적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초청이었다.

 아무튼 1988년에 조선천주교인협회(현 조선가톨릭교협회)가 결성되고 평양에 장충성당이 건립됐다. 해방 이후 공산 정권의 탄압으로 쓰러진 뒤 '침묵의 교회'로 변한 북한교회에 뭔가 변화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희망을 품게 했다. 난 좋은 기회다 싶어 사목자들을 장충성당에 파견하려고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보았다. 로마에 있는 북한대사에게는 "성당에 신부가 상주해야 참다운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면서 신부 2명과 수녀 3명 명단까지 넘겨주고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묵묵부답이었다.

 바티칸도 북한과 대화채널을 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천주교 신자라고 밝힌 사람들을 바티칸에 초청했는가하면 95년 북한에 큰물 피해가 났을 때는 식량구호기금을 들고 가서 대화를 시도했다. 99년에는 바티칸 공식대표단이 방북해 상당한 액수의 의약품과 식량을 전달했다.

 한국교회야말로 그동안 북한에 지극 정성을 쏟았다. 문이 꽁꽁 닫혀 있을 때도 외국 국적을 가진 교포들을 통해 북한 어딘가에 남아 있을 신앙의 불씨를 찾아보기도 하고, 90년대 중반부터는 '퍼주기식 지원'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식량지원에 열을 올렸다. 북에 국수공장을 세우고 배편을 통해 식량을 실어나른 것은 인도적 차원의 순수한 사랑이었다.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가 많은 일을 했다.

 나 역시 식량을 조금이라도 더 보내주려는 마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언젠가 북한 식량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신문방송사 카메라 앞에서 옥수수 죽도 떠먹어보았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좀 섭섭하다. 상대편이 우리 마음을 제대로 받아주질 않는 것 같다. 인적교류건 물적지원이건 일회성에 그친다. 설령 다음에 만나 좀더 깊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해도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둔다. 도무지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럴 때면 아직도 높기만 한 분단의 벽을 실감한다. 누굴 짝사랑하면 상대편이 자신의 순정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지 않은가. 우린 통일이 되면 가난한 형제를 돕는데 쓰려고 어려운 살림에 돈(서울대교구 통일기금)까지 모으고 있는데….

 이제 기도를 빼면 내가 민족화해나 통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열정이 식은 것은 아니다. 특히 교구장이면서 한번도 찾아가보지 못한 북녘 신자들에 대한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언제일지 모르나 통일이 되면 휠체어를 타고 라도 그들에게 달려갈 것이다.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켜온 양떼가 어딘가에 분명 있을 것이다. 6.25 전쟁 직전에 피랍되어 행방불명된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님을 비롯한 여러 성직자들의 무덤을 찾아 꽃 한송이라도 바치고 싶다. 평양과 덕원수도원에 남아 있던 내 소신학교 친구 3명도 분명히 순교했을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통일을 원하느냐고 물어보면 한목소리도 원한다고 대답한다. 그럼 통일을 위해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젊은이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 통일을 원하지만 자신의 역할은 거의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통일은 대통령이나 사회지도층이 성사시키는 줄로 알고 있다.

 참으로 통일을 원한다면 소극적 마음 자세부터 고쳐야 한다. 평화통일은 우리가 남을 위하고 사랑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리고 마음을 열고 다른 한 쪽을 받아들이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정말 북녘 동포를 형제로 생각하고, 가진 것을 떼어서 나눠줄 마음이 있는가. 그들을 받아들일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있는가.

 사도 바오로는 "나는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로마 9. 3)라고 말씀하셨다. 남북의 진정한 일치는 사도 바오로의 마음, 즉 신앙적 희생을 밑거름으로 한 초월적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도 변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빈부갈등, 이념갈등, 세대갈등으로 갈라져 있다. 요즘 생계형 자살이 속출하는 이유는 우리가 나눔에 인색하기 때문이다. 사회 분열이 끊이지 않는 것도 상대편의 다른 생각을 존중하지 않아서 그렇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반세기 넘게 다른 이념과 체제에서 살아온 북녘 동포와 일치할 수 있겠는가.

 진정 통일을 원한다면 주위의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훈련'부터 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의 벽부터 허물어야 한다. 통일의 꿈을 현실로 만들려면 우리끼리 먼저 화해하고 일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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