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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

6월 민주항쟁(2)

by 세포네 2010.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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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도 시간표가 있구나!

 

6월 항쟁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화를 갈망한 피플 파워(민중의 힘)의 위대한 승리였다. 사진은 한 다방 주인이 `6.29 선언` 발표에 감동한 나머지 커피를 무료로 준다고 써붙인 광고.

  "국민의 뜻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겠습니다."

  1987년 6월29일, 일본 나가사키에 내려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는 중이었다. 한국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시국수습 8개항'을 발표했다는 뉴스가 라디오에서 흘러 나왔다. 5공화국이 국민과 야당의 민주화 공세에 백기(白旗)를 든 '6.29 선언'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눈을 감았다. 명동성당에서 최루탄을 뒤집어 쓰고 눈물을 흘리면서 민주화 구호를 외친 젊은이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들을 무사히 집에 돌려보내기 위해 정부 당국자와 협상을 벌이던 긴박한 순간이 떠올랐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한국에서도 민주주의의 꽃이 필 것 같습니다.'

  감사기도가 절로 나왔다. 국민에게는 민주 쟁취지만 내게는 하느님께서 개입해 이루신 역사(役事)였다. 봄햇살 같은 희망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6월 항쟁 승리는 곧 군사정권 종식을 의미했다. 어느 누구도 그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뜻밖의 암초가 나타났다.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를 치르기로 했는데 양김씨(김대중, 김영삼)가 서로 자신이 야당 단일후보가 돼야 한다면서 고집을 부리는 것이었다. 참으로 답답했다.

  내 생각은 여느 국민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서로 양보해서 한 사람이 먼저 대통령이 되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 뒤를 잇길 바랐다.

  난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김영삼씨가 먼저 대통령이 되는 게 낫다는 입장이었다. 그 이유는 김대중씨를 기피하는 군(軍) 정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80년 '서울의 봄'때 만난 위컴 한미연합사 사령관은 "군에서 김대중씨의 사상과 행적에 관한 비밀문서를 냈는데 그는 제거되어야 한다는 게 문서의 최종 결론"이라고 귀띔한 적이 있다. 나는 펄쩍 뛰면서 "그건 잘못된 보고서"라고 반박했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절대 아니다. 만일 그 이유 때문에 군이 또 (쿠데타를 일으켜) 밖으로 나오면 이 나라는 더 깊은 불행의 늪으로 빠진다. 위컴 당신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지금 여기 머물고 있는 것 아니냐. 그렇다면 군 내부 동요를 막아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야당후보 단일화 문제로 시끄러울 때도 누군가가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면 군에서 가만 있겠느냐"면서 그쪽 정서를 일러준 사람이 있었다.

  그 즈음에 일본에서 가슴 아픈 얘기를 들었다. NHK 방송 뉴스 시간에 "한국인은 타협할 줄 모르는 민족"이라는 멘트가 나왔다. 그 말을 한 사람이 기자인지 정치평론가인지 모르겠으나 야당후보 단일화 소식을 전하면서 그런 모욕적 언사로 말을 맺었다. 남의 나라에 가서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가슴이 아프다 못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 방송국에 달려가 항의하고 싶었을 정도다.

  그런데 분을 삭이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 사람 말에 일리가 있었다. 군사독재 정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갈망했는가.

  대통령 직선제는 거저 얻은 게 아니라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피를 흘리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으면서 쟁취한 획득물이었다. 그 소중한 기회가 타협할 줄 모르는 두 야당 세력에 의해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김대중씨는 광주를 시작으로 전국을 돌면서 선거유세하듯 군중집회를 열고, 김영삼씨는 부산에서부터 그같은 행동을 취했다. 그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에게 내 의견을 충분히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우리 국민은 지금까지도 대화와 타협에 익숙치 않다. 노사갈등과 빈부격차, 여야대립 모두 대화할 줄 모르고, 타협할 줄 몰라서 점점 악화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주장은 무성하지만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어느 공동체나 갈등은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당시 양김씨가 타협을 통해 후보 단일화에 성공했다면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다. 그들이 끝내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민주주의에도 시간표가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노태우 후보와는 그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단 둘이서 2시간 가까이 식사하는 자리였는데 얘기를 주고받다보니까 어느새 시국 토론회가 되어 버렸다.

  "추기경님, 저는 좌경 학생들을 엄히 다스릴 생각입니다. 해방후 미군정이 남한에서 공산주의를 허용한 것이 결국 6.25 사변까지 이어진 것 아닙니까."

  "강경수단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서구 여러나라가 공산주의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한 비결은 정치에 대한 국민 신뢰입니다. 무엇보다 인권증진과 언론자유 등 민주주의 원칙을 변함없이 추구해왔기 때문입니다. 5공화국이 관공서마다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표어를 내걸었는데 과연 정의사회가 구현됐습니까. 정치가들이 사리사욕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더디게나마 민주화로 전진하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6월 항쟁이후 명동성당은 오랜 기간 몸살을 앓았다. 학생과 재야단체, 각종 이익집단의 단골 농성장이 되었다. 90년대 중후반까지도 성당 들머리에 시위대 천막이 걷힐 날이 없었는데 초기에는 그 소란에 적응이 안돼 무척 애를 먹었다.

  초기에는 어디가서 하소연할 곳이 없는 억울한 사람들, 생존권을 위협받는 힘없는 사람들이 주로 찾아왔다. 나나 명동성당이나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그들을 배려한다는 게 기본입장이었다. 국민들 사이에 '민주화의 성역'이라는 공감대가 차츰 형성되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에 그런 '성역', 또는 '아고라'(agora, 고대 그리스 시민광장)가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특히 벼랑 끝에 내몰린 사회적 약자들이 찾아와 가슴에 맺힌 말을 토로하고, 사회가 그들의 절규에 귀 기울여 주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힘있는 이익집단들이 장기간 상주하면서 '성역'을 스스로 훼손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그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이야 다시 말한들 무엇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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