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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

제5공화국과 가톨릭

by 세포네 2010.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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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문제 유연한 대처 바라며 全 대통령 면담

 

우리 사회는 제5공화국 말기에 이르자 민주화를 촉구하는 시민 학생들의 함성으로 요동쳤다. 사진은 김 추기경이 명동성당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는 모습(86년 11월 17일).

 1983년 전두환 대통령과 정확히 3시간10분 동안 마주앉은 적이 있다.

 학생시위를 비롯해 여러가지 시국 문제에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전달하려고 윤공희 대주교님(전 광주대교구장)과 함께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다.

 당시 독재타도를 외치는 대학생 시위가 빈발했다. 시위가 있는 날이면 신촌 대학가는 돌맹이와 화염병, 최루탄이 난무하는 게 영락없는 전쟁터였다. 정부는 늘 강경진압으로 맞섰다. 날이 갈수록 사회가 어수선하고 국론이 분열됐다.

 그날 집무실에서 잠깐 인사를 나눈 뒤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3시간 동안 앉아 있으면서 나와 윤대주교님은 별 얘기를 하지 못했다. 전 대통령 내외가 돌아가면서 쉬지 않고 얘기하는 바람에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 내외는 누군가에게 속사정을 털어놓고 싶었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어 꾹 참고 지내는 것 같았다.

 전 대통령은 "대통령 될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다"는 말을 거듭했다. 임기 후반부에 다시 만났을 때는 이런 말도 했다.

 "권력은 일단 한번 잡으면 놓고 싶지 않은 게 인간 본성입니다. 이 자리에 있으면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있어요. 주위에서도 (권력을) 놓지 말라고 조언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나 저는 내놓을 겁니다."

 전 대통령은 "사마란치 IOC 위원장도 88 서울올림픽을 치르려면 더 해야 하지 않느냐면서 연임을 종용했다"고 말하고 몇몇 인사들 이름까지 죽 나열했다. 약속대로 물러나기는 하겠지만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권력은 참으로 묘하다. 권력을 올바로 사용하면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만 그 단맛에 취해 이성적 판단이 흐려지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권력을 남성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군에서 남편이 별 한개 장성이면 부인은 별 두개 장성"이라는 말이 있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여성도 권력에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봉사와 희생 없는 권력은 진정한 권력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님도 이 점을 무척 강조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누구를 제일 높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옥신각신할 때 이렇게 말씀(루가 22,24-27)하셨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 특히 정치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복음이다.  

 "이 세상의 왕들은 강제로 백성을 다스린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백성의 은인으로 행세한다… 너희 중에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행세해야 한다. 식탁에 앉은 사람과 심부름하는 사람 중에 어느 편이 더 높은 사람이냐? 높은 사람은 식탁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여기에 와 있다."

 좀 빗나간 얘기지만, 권력으로 치자면 나만큼 장기간 절대권력(?)을 쥐어본 사람도 드물 것이다. 모든 권한이 집중되어 있는 교구장직을 30년 동안 수행했으니 말이다. 교구장들 중에는 교회법에 명시된 권한이나 권력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교구를 이끌어가는 분이 있는가 하면, 권력을 쓸 줄 모르는 분이 있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주변머리 없는 교구장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내 생각이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비쳐지지 않는 경우가 있는 모양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서품 2년차 젊은 신부가 사제직을 떠나면서 편지를 두번 보내왔는데 그 편지 속의 김수환은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독재자였다. 하도 기가 막혀서 그 신부와 만나 이야기를 해봤다.

 "난 자네와 이렇게 대면하는 게 처음이네. 자주 만나기라도 했어야 자네 표현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억압하지 않았을 텐가. 내게 부족한 점이 있거든 솔직히 말해 주게."

 "편지에 쓴 것은 체험에서 우러나온 얘기가 아니라 신학교에서 배운 내용입니다. 실제로 교구장은 모든 권력을 한손에 쥐고 교구를 통치하지 않습니까?"

 난 기가 막혀서 "허허"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서울대교구장으로 부임하기전부터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신부였는데 그가 사제복을 벗는 이유 중 하나가 "독재자 밑에 들어가 일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난 그 신부가 어디에 간다고 하면 추천서를 써주었을망정 인사발령 한번 내본 적이 없다. 내가 무슨 일이라도 시켜보고 독재자 소리를 들으면 덜 억울했을 텐데….

 원래 높은 자리라는 게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무척 힘들고 고독하다. 오해도 자주 받는다. 말 많고 탈 많은 본당에서 장(長) 자리를 맡아 일해본 사람은 쉽게 수긍할 것이다. 하물며 난 서울대교구 책임자였으니 오죽했겠는가. 다 지났으니까 털어놓는 얘기인데, 교황님께 보낼 교구장직 사직서를 쓰다가 찢어버린 게 몇 번인지 모른다. 심적 고통을 견디기 힘든 순간이 더러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로 버텼다. 교구장직 30년 버팀목은 다름 아닌 기도였다.  

 아무튼 유신정권 때와 마찬가지로 제5공화국과 가톨릭 교회는 편한 관계가 아니었다. 1982년 3월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관계를 더 악화시켰다.

   그 사건은 광주 항쟁을 묵인한 미국에 대한 반감이 폭발한 것인데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가 사건 주범 김현장, 문부식씨를 보호해 주는 바람에 불똥이 튀어 가톨릭이 한동안 여론의 뭇매에 시달렸다. 피의자들의 보호 요청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설득해 자수시킨 최 신부 행동은 정당했다. 그러나 신문방송은 가톨릭을 용공분자 비호세력으로 일제히 매도하기 시작했다. 부활 성주간 내내 비난성 기사가 쏟아졌다.

 난 성주간 성유축성미사에서 "최 신부 행동은 사제로서 정당하고 합당한 행동"이라고 옹호하고 정부를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언론의 '가톨릭 때리기' 이면에 숨어있는 정부 계락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조되는 반미감정을 꺾기 위해 희생양을 찾고 있던 정부 입장에서 방화사건은 호재였다. 더욱이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한 가톨릭 위상까지 동시에 무너뜨리는 것은 그야말로 '도랑치고 가재잡는' 일이었다. 당시 정부 압력을 거부할 수 있는 언론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래도 역사의 강물은 도도히 흘렀다. 민주화운동 분수령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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