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인박해는 이전의 신유ㆍ기해ㆍ병오박해때와 달리 생매장ㆍ백지사형 등과 같은 잔혹한 처형 방법이 전국에서 남발돼 1만여명의 순교자들을 탄생시켰다. 사진은 팔을 뒤로 묶어 나무에 매달아 가혹한 형을 가하는 '학춤형'을 재현한 모습. 평화신문 자료사진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전국 규모 박해다.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병인박해 기간을 1866년 초부터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로 설정하고 있지만 박해로 인한 순교자들은 1879년까지 탄생했다.
병인박해는 서양 세력의 조선 침입에 대한 위정자들 위기의식에서 발단됐다. 당시 조선 주변 정세를 보면, 영ㆍ불 연합군이 북경을 함락했고, 러시아가 남하정책에 따라 두만강 국경지대를 수시로 침범할 만큼 혼란스러웠다.
때마침 조정 대신들은 1865년 11월 북경에 간 사신으로부터 10년 넘게 천주교 신자들과 서양인들을 살육해온 '태평천국의 난' 소식을 전해듣고 자극을 받아 대원군을 압박, 박해령에 서명하도록 했다.
병인박해는 1866년 봄과 가을, 1868년 덕산굴총사건, 1871년 신미양요 등 크게 4단계로 전개과정을 구분할 수 있다. 병인박해는 1866년 2월말과 3월초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ㆍ볼뢰외ㆍ도리 신부, 홍봉주ㆍ정의배ㆍ전장운ㆍ최형 등이 잇따라 체포되면서 시작됐다. 이때 체포된 성직자는 새남터에서, 평신도들은 서소문에서 순교했다. 3월 중순에는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와 위앵ㆍ오매트르 신부, 황석두ㆍ장주기 등 5명이 체포돼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그러던 중 4월과 8월 두차례에 걸쳐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9월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했다. 또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상륙해 약탈을 자행한 '병인양요' 사건이 9월 발발했다.
프랑스 함대가 철군한 후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렵혀졌기에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라"며 선참후계(先斬後啓)의 명을 내렸다. 이후 수많은 순교자들이 양화진에서 참수형을 당해 '절두산'(切頭山)이라 불리게 됐다.
1868년 5월 충청도 덕산에서 오페르트와 페롱 신부, 미국인 젠킨스 등이 흥선대원군 선친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박해 불길은 다시 타올라 천주교 신자들을 나라를 배신한 역적으로 참수형뿐 아니라 생매장, 백지사형 등 잔혹 형으로 처단했고, 배교자까지도 유배형에 처했다.
박해는 다시 잠잠해졌다가 1871년 미 함대가 강화도까지 와서 통상을 요구한 '신미양요' 사건으로 재개됐다. 흥선대원군은 서울 종로를 비롯한 전국 8도 각 지역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해 오면 싸우거나 화친해야 하는데,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는 내용의 척화비를 세웠다.
교회는 병인박해 순교자를 대략 8000명에서 1만명으로 추산한다. 이들 중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들이다.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 중 24명만이 1968년 시복된 이후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성인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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