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품을 받고- "저를 조선교회 희생제물로 봉헌합니다"
◀ 김대건 신부는 순교자 가족으로 구성된 조선 교우 12명과 함께 라파엘호라 명명한 작은 돛단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 상하이로 간 후 사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ㆍ다블뤼 신부와 함께 귀국했다. 사진은 김 신부 일행이 라파엘호를 타고 풍랑을 헤치며 조선을 향해 항해하고 있는 모습을 재현한 작품.
어영청 군사들의 칼이 벌써 6차례나 내 목을 내리쳤습니다. 목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너무나도 크게 들려 잠시 놓쳤던 정신을 추스려봅니다.
사제품을 받고자 조선 신자들과 함께 쪽배를 타고 서해를 항해할 때도 잠시 정신을 놓친 적이 있었습니다. 거센 폭풍우로 배의 키가 부러지고 돛이 찢어져 표류할 때였습니다. 심한 뱃멀미와 허기로 모두들 정신을 잃었습니다
저와 운명을 함께한 일행은 현석문(가롤로), 이재의(토마스), 최형(베드로), 임치화, 노언익, 임성실, 김인원 등 12명으로 모두 순교자 가족입니다. 정신을 차린 신자들은 배가 침몰할까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저는 바다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으려고 품고 왔던 '바다의 별' 성모 마리아 상본을 높이 들어 보이며 "여기에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상하이에 도착할 것이고, 우리 주교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라며 이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저희는 1845년 6월4일 무사히 상하이에 도착했습니다. 바다에서 생활한지 한달여만입니다. 저희 일행은 영국 영사 도움으로 한 중국인 교우 집에 유숙했습니다. 하지만 집 주인은 조선인들을 잠시 받아들인 것을 관헌이 죄로 몰지 않을까 겁을 먹고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다시 정박해 놓은 쪽배에서 생활하게 됐습니다.
저는 조선 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예수회 고틀랑 신부님께 미사를 부탁드렸습니다. 먼저 고틀랑 신부님은 조선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셨습니다. 이들은 지난 6~7년간 고해성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기해박해때 앵베르 주교님을 비롯해 모방ㆍ샤스탕 신부님께서 순교하신 이후 조선교회에는 교우들에게 성사를 집전할 사제가 단 한분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일 먼저 고해성사를 받은 후 고해신부와 고해자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아 성사 내용을 통역했습니다. 신자들이 얼마나 정성껏 고해를 했는지 저희들은 해가 질 무렵에야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제3대 조선교구장이신 페레올 주교님께서 긴 여정을 마치고 마침내 상하이에 도착하셨습니다. 주교님은 저의 사제서품식을 서둘러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1845년 8월17일, 상하이 진쟈강(金家港)성당에서 저의 사제서품식이 거행됐습니다. 진쟈강성당은 상하이 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래된 곳이고 초기 난징(南京)교구 주교좌 성당이었던 유서깊은 장소입니다.
저의 사제서품식은 페레올 주교님 주례로 서양 선교사 4명과 중국인 신부 1명이 참석하고, 조선 신자뿐 아니라 중국인 교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행됐습니다.
신학생으로 선발된지 꼭 9년만이었습니다. 성인호칭기도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제단에 엎드린 저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안배라고 믿습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안배하심이 아니고선 3명의 신학생 가운데 가장 부족했던 제가 조선인 첫 사제로 맏배가 된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조선인 성직자의 맏배로 저를 선택하신 이유를 잘 압니다. 하느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 외아들을 십자가의 희생제물로 삼았듯이, 아브라함이 맏배를 번제물로 봉헌했듯이 조선교회를 위한 맏배의 희생을 원하신 것입니다.
저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제가 하느님 뜻대로 조선교회를 위한 흠없는 희생제물이 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그리고 성모님께 의탁했습니다. 제가 해야할 도리를 다할 수 있도록 어머니께서 늘 함께 해 주시기를 ….
저는 조선인 성직자 맏배로 조선의 뭇 백성들을 향해 걸음을 재촉할 것입니다. 차가운 밤 속에 빠져 진리도, 하느님도,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불행한 이들을 위해 숭고한 빛을 조선 산하에 밝힐 것입니다. 열의를 다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성스러운 사제직을 수행할 것입니다. 죽어야 한다면 죽을 것입니다. 죽음이 나의 거룩한 미래이며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입니다. 제 사제직의 열망은 하느님 뜻대로 죽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승리자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서품식을 마치자 조선 신자들이 저를 둘러싸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잘 것없는 우리를 축복하시어 조선인 사제를 탄생시키셨다"며 목이 터져라 노래하며 저를 얼싸안고 강강술래를 했습니다. 서양 선교사들도, 중국 신자들도 함께 어울려 원무를 그리며 저를 축하해주었습니다. 이날은 제가 순교를 눈앞에 두고 있는 오늘처럼 천국의 기쁨을 맛본 날이었습니다.
저의 첫 미사는 사제품을 받은 다음 일주일 후 8월24일 상하이에서 약 30리 떨어진 헝탕(橫堂) 성당에서 있었습니다. 이 곳은 상하이교구 사목을 책임맡은 예수회 소신학교 성당입니다.
성당 맨 앞자리에는 조선 신자들과 곧 저와 함께 조선으로 떠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곳 소신학생 33명도 함께 자리했습니다.
저는 조선 신자들에게 특별히 루카복음 21장7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재난의 때가 시작되면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지만,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조선 신자들에게 주님 안에서 용기와 힘을 얻고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 열과 성을 다하자고 권고했습니다.
첫 미사 후 8월31일 저는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을 모시고 조선인 교우 12명과 함께 조선 입국을 위해 '라파엘호'라 명명한 쪽배에 다시 올랐습니다.
'[가톨릭과 교리] > 가톨릭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삶과 신앙<4>순교 (0) | 2006.09.24 |
---|---|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 순교사 <3>병오박해 (0) | 2006.09.17 |
성지에 대해 알고 싶어요 (0) | 2006.09.12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삶과 신앙<2>신학생 시절 (0) | 2006.09.12 |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 순교사 <2>기해박해 (0) | 2006.09.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