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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가톨릭교리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삶과 신앙<4>순교

by 세포네 2006. 9. 24.

"교우 여러분,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이라는 교회 격언처럼 한국인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순교는 5000여명의 한국인 사제를 배출하는 씨앗이 됐다.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5월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103위 순교 복자를 시성하고 있다.

◀ 김대건 신부가 직접 그린 '조선 전도'

 

 

 

 이제 마지막인가 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온 백성에게 전하지 못하고 교우들보다 먼저 떠남이 미안할 따름입니다. 내 나이 25살. 짧지도 길지도 않은 4반세기 나의 인생은 모두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안배하심으로 순교자 집안에 태어나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았고, 조선인 첫 사제가 되어 이제 순교자 반열에 들어 하느님 나라를 눈 앞에 두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영청 군사가 내려친 일곱번째 칼날이 희미해진 마지막 저의 정신을 깨웁니다. 아직 저의 마지막 고해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하늘을 향해 꿇었던 무릎도 이젠 세상 사람들을 향해 꿇을 것입니다. 임종을 앞두면 누구나 선해지는가 봅니다. 저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도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니 말입니다. 제 정신이 또렷한 지금 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했던 모든 사람들, 그리고 저와 조선교회를 박해해온 모든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사실 저는 사제로서 사목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사제품을 받은 직후 상하이를 떠나 1845년 11월 서울에 도착한 다음 올해 5월까지 6개월간 사목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 서울 소공동 돌우물골에 은신하며 교우들을 사목했습니다. 그러던 중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성직자 영입을 위한 해로 개척 지시를 받고 돈 400냥을 지불하고 임성룡의 배를 구입했습니다.

 이후 저는 무쇠막과 서빙고, 수원 샘골, 용인을 거쳐 어머니가 거처하시는 은이에서 1846년 부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날이 어머니와 함께 했던 마지막 미사요 마지막 식사였습니다. 어머니와 교우들은 궁핍한 살림에도 예수님 부활과 사제품을 받고 귀향한 저를 축하하려고 조촐한 잔치를 열어주셨습니다. 그날 막걸리를 제게 권하던어머니의 눈빛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부활 8부를 지내고 바로 서해안 해로 개척을 위해 마포나루를 출발해 강화, 연평도, 장연 터진목을 거쳐 황해도 작은 섬마을인 순위도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이곳까지 항해하면서 상하이에 머물고 계신 메스트르 신부님께 보낼 해도를 그려 중국인 선원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순위도 등산나루에서 우리 배를 징발하려는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날이 1846년 6월5일이었습니다. 포졸들은 내 짐보따리에서 예수성심상과 성모자상, 언문으로 된 기도서를 발견하고는 저희 일행을 곧장 해주 감영으로 압송했습니다. 황해 감사는 저의 체포 사실을 곧바로 의금부에 보고했고, 의금부는 다시 국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저는 체포된 이후 교우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중국인이라고 거짓 증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제가 중국인 선원들에게 전달했던 해도와 편지가 발각, 압수돼 정체가 탄로나고 말았습니다.

 국왕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제가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사제가 되어 귀국한 사실에 무척 놀라워했습니다. 저는 왕명에 따라 의금부로 다시 압송됐고, 40여차례 문초를 받았습니다. 이 와중에 저와 가까이 했던 이의창(베난시오)ㆍ이재용(이재의 토마스)ㆍ이기원(이신규 마티아)ㆍ현석문(가롤로) 등이 체포됐습니다.

 때마침 세실 함장이 이끄는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 인근까지 와서 기해박해때 순교하신 앵베르 주교님과 모방ㆍ샤스탕 신부님 처형을 책임지고 통상을 요구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조정은 이 일을 저와 연계시켜 조국을 배반한 반역자로 몰아붙여 군문효수형을 선고했습니다.

 사형선고 다음날인 오늘(1846년 9월16일) 저는 지금 형장인 새남터에 있습니다. 박해자들이 예수님께 갖은 모욕을 다했듯이 군사들은 제 속바지까지 벗기고 두손을 등 뒤로 묶은 채 얼굴에 횟가루를 뿌리고 갖은 희롱을 했습니다.

 저는 군중들에게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와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며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진실로 저는 우리 민족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천주교 신앙을 고백하길 간절히 희망합니다. 제가 기쁘게 죽을 수 있는 것도 이전의 순교자들처럼 저의 희생이 조선교회의 초석이 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25년간의 삶을 마감하고 하느님 나라에서 새로이 태어나려 합니다.

 "교우 여러분, 부디 우애를 잊지 말고 서로 돕고 큰 사랑을 이뤄 이 환난을 이겨내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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