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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가톨릭교리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 순교사 <3>병오박해

by 세포네 2006. 9. 17.

◀ 병오박해 순교자 9위 중 김대건 신부와 현석문을 제외한 7명은 포도청에서 곤장형을 받고 순교했다. 사진은 곤장형을 재현한 인형물. 평화신문 자료사진

 

 

 

 병오박해는 1846년 6월5일 김대건 신부 체포를 계기로 시작돼 9월20일 김 신부 순교 직후 종결됐다. 김 신부는 수감중 6차례에 걸쳐 40번의 문초를 받았지만 자기 신상에 대해서만 발설했을 뿐 교회 내부 사정을 실토하지 않았다.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등 선교사들이 활동 중이었는데도 김 신부의 용기있는 행동으로 조선 천주교회는 큰 희생없이 박해를 피해갈 수 있었다. 3개월여 박해 기간동안 순교한 신자는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모두 9명에 불과했다.

 1839년 기해박해 이후 1840년대 중반까지 조선 천주교회는 비교적 평온한 상태에서 교회를 재건할 수 있었다. 기해박해 이후 국경 수비대의 강화로 육로를 통해 국경을 통과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김대건 신부는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 지시로 부제시절부터 해상 입국로 개척에 힘썼다. 김 신부가 1845년 8월 사제품을 받은 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해상으로 입국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페레올 주교는 1846년 봄이 오자 김 신부에게 최양업 신부와 매스트르 신부가 입국할 수 있는 새로운 해상 입국로 개척을 지시했다. 김 신부는 교구장 지시에 따라 배를 빌려 한강 마포나루에서 부터 서해안 연평도, 백령도를 항해하면서 해상도를 작성했다. 그리고 중국 어선과 접촉, 상해에 있는 매스트로 신부에게 지도를 전하려 했다.

 김 신부는 이 와중에 1846년 6월5일 순위도 등산진에서 배를 징발하려는 포졸들에게 일행과 함께 체포돼 해주 감영을 거쳐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됐다. 또 포졸들은 김 신부 은신처 한양 돌우물골 가옥과 김 신부가 성장했던 용인 은이 교우촌을 덮쳐 현석문(가롤로)를 비롯한 신자 다수를 체포했다.

 김대건 신부 체포는 조정에서 큰 문제가 됐다. 김 신부는 체포된 직후 조선 땅에 몰래 들어온 중국인으로 행세했을 뿐 아니라 그가 중국인 어부에게 전해준 서해 연안 지도와 편지가 압수돼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때마침 세실 함장이 이끄는 3척의 프랑스 함대가 8월 초 충청도 외연도 인근에 들어와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를 처형한 것에 대해 항의하면서 회담을 요청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에 헌종과 대신들은 9월5일 묘당회의와 15일 어전회의를 잇따라 열고 김 신부 처리 문제를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김 신부와 체포된 일행은 서양 선박을 국내로 불러들인 역적으로 간주돼 사형이 선고됐다.

 김대건은 9월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25살 나이로 순교했다. 이어 김 신부 순교 3일 뒤인 9월19일 현석문(49)도 군문효수형을 받고 치명했다. 또 포도청에 갇혀있던 임치백(요셉)ㆍ남경문(세바스티아노)ㆍ한이형(라우렌시오)ㆍ이간난(아가다)ㆍ우술임(수산나)ㆍ김임이(데레사)ㆍ정철염(가타리나)도 같은 날 곤장을 맞고 순교했다.

 페레올 주교는 이들 순교자들 행적을 철저히 조사해 「병오일기」를 작성, 홍콩으로 보냈고, 마침 홍콩에 머물고 있던 최양업 부제가 이를 라틴어로 번역해 기해박해 순교자 행적과 함께 1847년 교황청 예부성성으로 보냈다.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병오박해 순교자 9명은 1925년 7월5일 기해박해 순교자 70위와 함께 시복됐고, 1984년 5월6일 성인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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