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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한국교회사80장면

(16) 한국가톨릭농민회 발족 (1972년)

by 세포네 2006. 9. 17.

 

 “생활개선, 계몽교육으로 농촌을 그리스도화 하자”

“가톨릭농촌청년회(JAC) 농촌 그리스도화 운동 발족 - 각지 60여 대표 경북 구미서 농한기 선용 등 논의

가톨릭농촌청년회(JAC)가 17일 구미본당 구내 강당서 전주, 수원, 대전 교구와 왜관 감목 대리구의 신자들 6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되었다.

“새로운 방법과 생활로 농촌을 그리스도화하자”는 ‘슬로간’으로 벨기 ‘루뱅’서 1925년 발족한 동 운동이 이로써 한국서도 발족하게 되었다.

가톨릭노동청년회(JOC)의 지난 3년간의 준비작업을 기반으로 한 동 운동은 그간 JOC운동을 적용한 JAC운동을 준비해온 구미본당 주임 이 그레고리오 신부(분도회원)와 JOC 농촌부 책임자였던 이말딩(광주 출신)씨에 의해 창립 작업이 주도된다.” (가톨릭시보 1966년 10월 23일자 3면 중에서)

농민, 노동문제 함께 풀어

한국 사회의 농민운동은 60년대 한국 가톨릭 농촌 청년회의 태동과 함께 시작됐다. 70년대 들어 국가 정책으로 시작된 개발 독재의 모순이 깊어지면서 농민운동은 '한국가톨릭농민회'라는 조직 운동을 통해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한국 사회의 농민운동은 80년대 후반까지 대부분 한국가톨릭농민회의 조직 역량에 의존해 전개됐으며 그만큼 가톨릭 농민회의 역사적 의의와 중요성은 큰 관심을 가져야하는 부분이다.

한국가톨릭농민회는 1964년 10월 17일 가톨릭 노동청년회 내에 설치됐던 농촌 청년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당시 노동청년회에서 활동하던 도시 노동자들은 대부분 농촌 출신으로 어려운 농촌 살림을 견디지 못한 청년들이었다. 이에 노동청년회 평의회는 노동 문제가 농민 문제의 연속이라는 점에 주목해 농촌 청년부를 조직했다.

이후 광주대교구 함평, 전주교구 화산, 함열, 진안, 남원, 등지와 수원교구 양지본당을 중심으로 ‘JAC 교재’, ‘JAC 개요’ 등의 자료를 발간해 교육 및 홍보활동을 전개했다.

농촌 청년부가 자리를 잡아가던 1966년 농촌 청년부 전국 대표였던 이길재는 왜관 감목 대리구장이던 베네딕도 수도회의 하스(O. Haas) 아빠스로부터 구미에서 활동해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이에 따라 대표는 왜관 감목 대리구를 중심으로 활동의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결정, 경북 구미로 사무실을 이전했다.

1966년 8월 노동청년회 전국 평의회는 농촌 청년부를 완전 분리하기로 결정하고 10월 17일 전국 남녀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경북 구미에서 ‘한국 가톨릭 농촌 청년회’를 창립한다.

그리고 1971년 8월 ‘선진국 농업의 생산 과잉과 한국 농업’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고 본격적인 조직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가톨릭 농민 운동 조직 강화 위원회를 결성하고 이듬해 4월 제3차 전국 대의원 총회에서 청년회의 명칭을 ‘한국가톨릭농민회’로 개칭했다.

가톨릭시보는 창립총회를 보도하면서 당시의 취지와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17일의 창립식서 35명의 회원이 입회선서를 한 후 회원들은 각 출신교구별 대표 12명으로 하여금 ▲JAC 조직과 운영 ▲전국 및 국제 조직간의 유대 ▲회원자격 ▲연간 활동 계획 등 문제의 논의를 위임했다. (중략) 농촌은 버림받은 땅이 아니며 한국 인구의 7할이 농민임을 감안하고 농촌의 생활 개선, 계몽, 교육이 복음적 정신임을 강조하면서 제도신부인 이 신부는 동회 입회자격은 18세 이상 35세까지의 남녀는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데 신앙과는 관계가 없다고 하면서 교회의 공식 인준은 동회가 착실히 발전한 이후라야 할 것 같다고 전망했다.” (가톨릭시보 1966년 10월 23일자 3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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