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
◀ 김대건을 비롯한 조선 신학생 3명은 중국 땅을 횡단해 6개월여만에 마카오에 도착,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마련된 조선신학교에서 교수신부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사제로 양성됐다. 사진은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 인근 카모에스 공원에 설치된 김대건 신부 동상.
신학생으로 선발된 저는 1836년 7월11일 서울 모방 신부 댁으로 갔습니다. 그 곳엔 저보다 먼저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토마스)과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기숙하면서 라틴어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이 곳에서 곧바로 라틴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모방 신부님 말씀에 따르면,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께서 '요동신학교'를 세워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서거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 일찍이 요동 지방과 조선의 사정을 체험하신 모방 신부님은 요동 땅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우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요동에 신학교를 세울 경우 중국어가 일종의 필수 과목이 되기에 라틴어 학습이 늦어지고, 조정이 이를 알게 될 경우 조선교회가 위험에 처해질 것 같아서랍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 책임자인 르그레즈와 신부님 지시에 따라 마카오 유학길에 오르게 됐습니다.
1836년 12월3일 저희 조선 신학생 3명은 모방 신부님께 '신학생 서약서'를 제출하고 곧바로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중국인 여항덕(일명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와 정하상(바오로)ㆍ조신철(가롤로)ㆍ이광열(요한) 형제님이 길 안내자로 동행했습니다.
저희 일행은 평양과 의주 변문을 거쳐 1836년 12월28일 중국 봉황성 책문에서 샤스탕 신부님과 상봉했습니다. 교회 어른들과 헤어진 저희들은 샤스탕 신부님께서 데려온 중국인 길 안내자를 따라 중국 땅을 횡단, 1837년 6월7일에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이후 저는 1842년 2월15일 마카오를 떠날 때까지 4년6개월간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마련된 조선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사실 저는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어릴 적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키는 컸지만 영양부족으로 가슴앓이와 위장병, 요통, 두통을 달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얼굴은 황달에 걸린 사람처럼 늘 누렇게 떠있었고 머리카락도 하얗게 탈색됐습니다. 그래서 교수신부님들은 항상 제 건강을 염려하셨습니다만 정작, 동기인 최방제가 위열병으로 먼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신학교에 온지 6개월여 만에 일어난 이 일은 저희들에겐 날벼락이었으며 교수신부님들께는 태산같은 걱정을 안겨드렸습니다.
저희는 조선신학교 교장 칼레리 신부님과 리브와ㆍ데플레슈ㆍ베르뇌ㆍ메스트르 신부님 등으로부터 지도를 받았습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삼위일체론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양업이 '아버지가 아들보다 더 능해야 한다'는 이유로 성부보다 성자가 덜 능해야 한다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또 성사론을 배우면서 교수신부님은 대죄만은 모두 고해야 하지만 소죄는 고할 엄격한 의무가 없다고 설명한 반면, 저희들은 어떤 것이든 소죄를 고하지 않는 사람은 통회가 없고, 그러한 상태에서 사죄를 받으면 독성죄를 범한다고 주장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저희들 공부 과정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마카오에 도착한 지 2개월만에 일어난 민란으로 필리핀 마닐라로 일시 피신해야 했으며, 1839년 4월에도 아편 문제로 마카오와 광동지역에 소요가 일어 마닐라 롤롬보이에서 약 6개월여 동안 피신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 대표로 선출된 리브와 신부님 명에 따라 1842년 2월15일 메스트르 신부님과 함께 세실 함장이 이끄는 에리곤호를 타고 마카오를 떠나 1차 조선 입국로 탐색 여행에 나섰습니다. 동기 최양업은 만주 선교사인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함께 같은 해 7월17일 마카오를 떠나 8월27일경 저희 일행과 합류했습니다.
이 때부터 4년6개월간 저는 조선 입국로 개척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1차 입국로 개척 도중인 1842년 8월29일, 저는 '난징조약' 체결식장에 세실 함장 통역자로 참석했습니다. 같은 해 12월27일, 요동땅 봉황성 책문에서 조선교회 밀사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고 페레올 주교님과 최양업이 기다리고 있던 소팔가자로 귀환했습니다.
2차 시기는 1844년 2월5일이었습니다. 북방 입국로를 개척하라는 페레올 주교님 지시에 따라 소팔가자를 출발해 훈춘(琿春)을 거쳐 3월8일 조선으로 입국, 국경 인근 경원에서 밀사들을 만났습니다.
그 1844년은 저희들에게 축복의 해였습니다. 조선 입국로 개척 등으로 부족한 공부를 8개월여에 걸쳐 보충한 저희들이 그해 12월10일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부제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기쁨도 잠시 저는 다시 조선 입국로 개척을 위해 3차 여행을 떠났습니다. 1845년 1월1일 봉황성 책문에서 김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조선 밀사들을 만나 의주를 통해 꿈에 그리던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저희 일행은 평양에서 기다리고 있던 현석문(가롤로)ㆍ 이재의(토마스) 등과 합류한 후 1월15일 마침내 서울에 당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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