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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가톨릭교리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삶과 신앙<1>

by 세포네 2006. 9. 6.

믿음의 씨앗 심어 교회를 크게 세워라

 

◀ 한국인 첫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지인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솔뫼성지에 복원돼 있는 김 신부 생가. 김대건 신부 일가는 김 신부의 증조부때부터 가톨릭 신앙을 수용해 실천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이다. 또 올해 9월16일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순교 160주년이 되는 날이다. 여느 해보다 뜻깊은 순교자 성월을 맞아 김대건 신부 자신의 1인칭 화자(話者) 시점에서 성인의 삶을 4회에 걸쳐 재조명한다.


 지금 제 주위로 12명의 군사들이 칼을 휘두르며 저를 희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의 속바지까지 벗기고 양 손을 등 뒤로 묶은 채 얼굴에 물을 뿌린 뒤 횟가루를 뿌렸습니다. 그들 중 한 군사가 휘두른 무딘 칼날에 저는 지금 목 아래로는 전혀 움직일 수 없습니다.

 목 뒷덜미에서 뿜어져 나와 고운 모래를 적시는 더운 선혈을 보면서 저는 행복하기만 합니다. 제가 마냥 기쁜 것은 천주를 위해 죽기 때문입니다.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이므로 저의 피로 적신 모래알 수 만큼이나 이 땅에 많은 천주교인이 늘어날 것이므로 저는 기꺼이 이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지금 한 군사가 또 제 목을 칼로 내리쳤습니다. 두번째 입니다. 지금 저의 죄를 사해줄 사제가 없기에 예수님 앞에 마지막 고해를 드립니다.

 저는 김대건 안드레아 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1845년 8월 상해에서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님에게 사제품을 받고 조선인 첫 신부가 됐습니다.저는 김해 김가 안경공파 19세손으로 족보 이름(譜名)은 '지식'(芝植)입니다. 저는 집안 어른들이 지어주신 제 이름을 사랑합니다. 어떤 뜻으로 제 이름을 지으셨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제 나름으로 '믿음의 씨앗을 심어(芝植) 교회를 크게 일으켜라(大建)'는 의미로 새기고 있습니다.

 부친은 김제준(이냐시오)이고, 모친은 장흥 고씨로 세례명은 우술라 입니다.저는 충청도 내포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1821년 8월21일 태어났습니다. 형제로는 남동생 '난식'과 누이 한명이 있습니다. 어릴 때 어른들이 저를 '또복'(再福)이라 부른 것을 보면 아마도 제 위에 일찍 죽은 형이 있은 듯 합니다.

 저희 집안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은 증조부(김진후 비오, 보명 운조)때 입니다. 증조부 김진후는 정3품계 당상관직의 '통정대부'를 지내신 분입니다. 저희 집안은 원래 강릉 지방에 살았으나 그후 충청도 예산 계촌리로 이주했고, 증조부때 솔뫼에 정착했습니다.

 증조부는 솔뫼에서 10여리 떨어진 여사울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과 교분이 두터웠고,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그를 통해 천주교를 알았습니다. 하지만 증조부는 관직에 있던터라 입교하지 않고, 장남 '종현'에게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때 순교하신 제 부친도 "큰아버지 종현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천주교에 입교했다"고 진술한 것을 보면 종현 큰할아버지가 저희 집안 모두를 입교시키신 것으로 보입니다.

 증조부 김진후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1788년께 세례를 받고 1791년 신해박해때 처음으로 체포된 후 1801년 신유박해때 유배됐다가 1805년 다시 체포돼 10년간 옥살이를 하던 중 76살로 순교했습니다.

 저희 집안에서 첫 세례를 받은 김종현 큰할아버지는 주문모 신부에게 직접 받은 성경과 묵주를 항상 지니고 다니며 기도할 만큼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신 분입니다. 증조부 순교 후 박해를 피해 저희 집안이 서울 청파동을 거쳐 경기도 용인 한덕골 첩첩 산중으로 이주한 것도 김종현 큰할아버지의 결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제가 모방 신부로부터 신학생으로 선발돼 사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주문모 신부와 교회 지도자들과 교분이 깊었던 큰할아버지의 힘이 한 몫 했을 것입니다.

 작은 할아버지 김한현(漢鉉, 안드레아)은 신유박해 이전 안동 땅 우련밭(현 봉화군 재산면)으로 떠나 17년간 신앙생활을 하다 1815년 을해박해때 체포돼 1816년 대구 감영에서 참수 순교했습니다.

 할아버지 김택현은 이존창의 딸 멜라니아와 혼인해 부친인 '제준'과 작은 아버지 '제철'을 낳았습니다.

 부친 김제준은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던 해에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어린시절 솔뫼에서 박해받는 천주교 가문에서 성장했습니다. 부친 김제준은 종현 백부의 권유에 따라 62살 고령인 할아버지와 하나밖에 없는 24살의 동생 제철, 그리고 부인과 갓 태어난 저를 데리고 고향을 떠나 용인 한덕골로 이주했습니다. 이때가 1827년으로 부친 김제준의 나이 33살 때였습니다.

 한덕골에서의 저희 가족 생활은 무척 곤궁했습니다. 택현 할아버지가 1830년에, 제철 작은 아버지가 1835년에 선종했습니다. 이후 부친은 한덕골을 떠나 보다 좋은 생활조건의 교우촌 '골배마실'로 남은 가족을 이끌고 이주했습니다.

 부친 김제준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로 신앙생활과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러다 1815년 을해박해 이후 조선교회 재건에 힘쓰던 정하상(바오로)을 만난 후 다시 신앙을 회복했습니다.

 부친 김제준은 1836년 초 입국해 정하상의 집에 거주하던 모방 신부를 찾아가 성사를 받고 골배마실로 돌아왔습니다. 부친은 그 해 부활절을 전후해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 공소를 순방하던 모방 신부를 골배마실에 인접한 '은이'에서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부친이 모방 신부와 두번째 만남을 같던 이날 저는 모방 신부로부터 신학생 후보로 선발돼 세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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