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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가톨릭교리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 순교사 <1>신유박해

by 세포네 2006. 9. 6.

◀ 가위주리는 두 무릎과 팔을 묶은 후 두 개의 장대를 정강이 사이에 끼워 양끝을 엇갈리게 틀면서 휘게하는 형태로 이 형을 받는 이들 대부분은 팔다리가 부러진다. 사진은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돼 포졸들로부터 가위주리형을 당하고 있는 장면.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아 초기 신자들의 순교 정신을 되새겨 보기 위해 신유ㆍ기해ㆍ병오ㆍ병인 4대 박해의 배경과 전개상황, 의미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사학은 어버이도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돼 저절로 오랑캐와 짐승의 지경에 떨어지니… 감사와 수령은 사학을 하는 자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고, 개전하지 않는 무리에게는 역률로 다스려 진멸함으로써 따르는 무리가 없도록 하라."

 1801년(신유년) 음력 1월10일 정순왕후 김씨가 내린 천주교 금교령이다. 이 금교령으로 시작된 신유박해는 그해 12월22일(음) '척사윤음' 반포때까지 계속됐다.

 정순왕후 김씨(1745~1805)는 영조의 계비로 정조 서거 후 11살의 순조를 대신해 1800년 6월부터 1803년까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이 시기 동안 친정 경주 김씨 집안의 친인척을 요직에 앉혀 정권을 노론 벽파에 넘겨주고, 정치적 반대 세력인 남인 시파를 제거하려고 천주교 박해를 일으켰다. 당시 조선천주교회는 정조의 온건 정책으로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1794년 입국해 활동하고, 전국 신자 수가 1만명이 넘을 만큼 널리 확산돼 있었다.

 조선 천주교회에 가해진 첫번째 전면 박해인 신유박해는 △1월 정약종 책 궤짝 사건 △4월 주문모 신부 자수 사건 △8월 황사영 백서 사건 등이 연이어 터지면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참수형에 처하는 등 잔혹하게 전개돼 교회를 빈사상태에 빠지게 했다.

 신유박해 대표적 순교자로는 주문모 신부,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윤유일(바오로), 강완숙(골룸바), 유항검(아우구스티노), 동정부부 유중성(마태오)과 이순이(루갈다) 등이 있다.

 신유박해는 천주교 신자들을 '매국노' '불효자' '풍속문란자' 등으로 규정한 척사윤음을 마련, 언제라도 천주교를 박해할 법적 근거를 남겼다.

 신유박해는 일시적으로 교회에 큰 타격을 주었으나, 궁극적으로는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전국으로 흩어져 교우촌을 형성하고 산간오지에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돼 오히려 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또 신유박해를 계기로 교회 지도층 양반 신자 대부분이 순교하거나 배교로 교회를 떠나 중인 이하 신분층이 교회 구성원 대부분을 차지해 민중교회로 탈바꿈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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