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해박해 당시 조선 교회를 이끌던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가 순교하는 장면을 묘사한 인형 작품. 평화신문 자료사진
한국 천주교 초기 100년간 박해 역사 가운데 3차례 전국 박해가 정순ㆍ순원왕후의 수렴청정기에 일어났다. 1801년 신유박해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1839년 기해박해와 1846년 병오박해는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가 친정의 이익과 척족세력의 집권을 위해 천주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일으킨 것이다.
기해박해는 1839년(헌종 5년) 4월부터 11월까지 전국적으로 일어난 박해다.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를 등에 업고 정적인 남인 시파를 몰아내려고 1801년 신유박해를 주도한 노론 벽파는 1805년 1월 정순왕후가 죽자 곧 몰락했다. 순조 비 순원왕후의 친정인 시파의 안동 김씨 집안이 노론 벽파의 자리를 대신했다. 순원왕후는 1834년 11월 순조가 서거하자 그의 손자인 8살의 헌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고, 오빠 김유근으로 하여금 정사를 보필하게 했다.
김유근은 1836년 중풍에 걸려 말조차 제대로 못하게 되자 절친했던 유진길(아우구스티노)에게 대세를 받기도 했다. 이 시기 조선 천주교회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재정비, 신자 수가 1만명이 넘을 만큼 성장했다.
그러나 김유근의 은퇴로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우의정 이지연이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이지연은 헌종 모 효유왕후의 풍양 조씨와 손잡고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고자 천주교 박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순원왕후는 1839년 4월18일 이지연의 상소를 받아들여 '사학 토치령'을 반포하고 기해박해를 공식적으로 재가했다.
박해의 불길은 서울뿐 아니라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경상도 등 전국적으로 번졌다. 배교자 김순성(일명 김여상)은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의 입국 사실을 밀고했을 뿐 아니라 앞장서 교우촌을 찾아다니며 신자들을 색출했다. 김순성의 밀고로 체포돼 순교한 대표적 인물로는 정하상(바오로), 현석문(가롤로), 조신철(가롤로), 유진길(아우구스티노), 그리고 최양업 신부의 부모인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이성례(마리아) 등이다. 또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도 사위의 밀고로 순교했다.
박해가 거세지자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는 신자들 희생을 막으려고 자수,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또 정하상은 조정의 천주교 박해에 대해 부당함을 밝히는 「상재상서」를 올려 천주교를 변호했다. 또 현석문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일일이 기록한 「기해일기」를 저술했다.
「헌종실록」에 따르면 기해박해 동안 사형된 이가 118명, 옥사 1명, 배교로 석방된 이가 48명이었다. 기해박해 순교자 중 정하상을 비롯한 70위가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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