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프놈펜 시가지에서 만난 캄보디아의 미래들. 최근 캄보디아인들 사이에서는 활발한 교육 사업을 전개하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확산되고 있다.
▶현재-프놈펜의 한 에이즈 환자 요양소에 입원해 있는 환자. 캄보디아 에이즈 환자는 약 17만명. 전체 인구의 약 2.6%가 에이즈로 고통받고 있다.
▶과거-프놈펜 시가지에 위치한 뚤슬랭(Toul slang) 전쟁박물관에서 만난 유골들. 캄보디아 한(恨)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종교 자유와 선교가 보장된 나라 캄보디아
박해역사 주변정세 우리와 비슷
동남아시아 복음화 중심국 부상
어쩜 이렇게도 우리와 닮았을까.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리적 위치, 혹독한 박해 후 새로 돋아나는 신앙, 심지어 한(恨)의 역사까지…. 그래서일까.
우리 작가 중 드물게 ‘아시아’에 천착하고 한반도와 아시아의 연대를 모색해온 여행가 유재현씨는 〈메콩의 슬픈 그림자, 인도차이나〉(창비)에서 미국과 베트남, 태국 등 주변국들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캄보디아를 ‘슬픔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본 캄보디아의 ‘현재’는 다르다. 최근 캄보디아는 넓게는 동남아시아, 좁게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선교 전초기지로 부상하고 있다. 서쪽 국경과 맞닿은 태국은 선교 목적 입국이 불가능하다. 동쪽의 베트남은 공산국가. 북쪽의 라오스와 중국도 아예 선교활동이 불가능하고 아래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이슬람국가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캄보디아에서만 유일하게 종교 자유와 선교가 완전 보장되고 있는 것. 한국 개신교에서 캄보디아를 중점 선교국으로 정해, 막대한 인적 물적 역량을 집중시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획 ‘아시아 교회가 간다’ 첫 번째 국가로 캄보디아를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 메콩의 슬픈 그림자
1975년 4월14일. 폴포트 지휘를 받는 공산 크메르루즈 군(軍)이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의 코 앞까지 진군했다. 일촉즉발의 위기. 로마 교황청은 이 위급한 시기에 캄보디아인 츠마르(Joseph Chhmar Salas) 몬시뇰을 주교로 임명했다. 츠마르 주교는 급히 주교서품식을 갖고 프놈펜 교구장에 착좌했다.
착좌식 3시간 후. 프놈펜이 함락되고 공산군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학살이 시작됐다. 츠마르 주교와 5명의 캄보디아인 사제가 끌려가 죽음을 당했다. 수도자와 신자들도 예외가 아이었다. 수백년 전통을 지닌 아름다운 성당들도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됐다.
교회뿐 아니었다. 크메르루즈 정권은 1979년까지 5년간 지식인에 대한 학살을 계속했다. 당시 인구 600만명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200만명이 이 시기에 학살과 기아, 질병으로 사망했다. 폴포트가 물러나자 베트남군이 왔다. 베트남은 1979년에 침공, 폴포트 정권을 몰아내고 10년간 지배했다.
캄보디아가 독립한 것은 1990년. 캄보디아 인들은 환호했다. 이제는 ‘우리 힘으로 잘 살아보자’를 외쳤다. 하지만….
▨ 그치지 않는 고통
‘부~웅’ 진땀이 흘렀다. 호기심이 화근이었다. 캄보디아의 대중 교통수단인 오토바이 택시(모터돕)를 타겠다고 나선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추월과 과속, 역주행은 다반사. 신호등은 아예 무시했고, 보행자 건널목은 있으나 마나였다.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 오토바이는 그렇게 프놈펜 시가지를 벗어나 한참을 달렸다.
1시간이 흘렀을까. 오토바이 기사 허리춤을 꽉 부여 잡은 손이 저려올 때 쯤, 한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언롱찡안(onlongchingan). 최근 캄보디아 정부는 프놈펜시에 있던 도시빈민 5천여명을 이곳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가톨릭 NGO 단체가 지원하는 하루 1달러(한화 약 1000원)가 유일한 수입인 사람들. 오토바이가 마을로 들어섰다. 가난에 지친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 둘 옆을 스쳐 지나갔다. 6~7살이나 됐을까. 어린 아이 셋이 낯선 이방인이 신기한 듯 오토바이 뒤를 따라 달렸다.
▨ 캄보디아 개관(2005년말 현재)
- 인구 1360만7069명
- 인구분포 : 0~14세 37.3%, 15~64세 59.6%, 65세 이상 3.1%.
- 1인당 GNP 약 300달러. 공장 노동자 한 달 평균임금 50달러
- 면적 : 18만 ㎢(남한의 약 1.8배)
- 화폐단위 : 리엘(Riel), 1달러=4000리엘. 쌀 20㎏=2만 리엘(한화 약 5000원)
- 기온 : 건기(11~5월) 30~39℃, 우기(6~10월) 25~32℃
- 산업 :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농업에 종사. 그러나 관계시설 부족, 지뢰 등으로 인해 전체 가용 경지면적의 약 20% 밖에 활용 못함.
- 종교 : 전체 인구 90% 이상이 불교(소승불교) 신자. 나머지는 이슬람, 토속신앙, 기독교 등. 가톨릭 신자는 약 3만여명(예비신자 교육기간 3년). 최근 한국 개신교의 활발한 선교활동으로 개신교 신자 수가 급증하는 추세.
■인터뷰 / 캄보디아·라오스 주교회의 의장 에밀 주교
“공산정권에 성직자 수도자 몰살
토착화 사제양성 성당건축 시급”
“팽팽팽팽” 천정에 대형 선풍기가 매달려 돌고 있었다. 하지만 연일 섭씨 30도를 웃도는 캄보디아의 3월 더위를 밀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대형 선풍기 아래. 70세 프랑스인이 맨발에 흰색 셔츠 차림으로 환하게 웃고 있다.
“인터뷰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주교 복장으로 갈아 입어 주시겠습니까.” 정중히 부탁했다. 명색이 캄보디아 프놈펜 교구장이자, 캄보디아·라오스 천주교 주교회의(CELAC) 의장이다. 하지만 에밀(Emile Destombes) 주교는 정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캄보디아는 더운 나라입니다. 로마와는 다릅니다. 사는 그대로의 모습이면 충분합니다.” 에밀 주교는 “사제 서품식, 성유축성 미사, 성당 봉헌식 등 공적 행사가 아니면 다른 캄보디아 사람들처럼 맨발에 평복 차림으로 생활한다”며 양해를 구했다.
캄보디아에서는 캄보디아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 이야기는 자연스레 ‘토착화’로 시작됐다. “토착화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넘어야 할 산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지난 수 천년 동안 불교 문화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문화 속에서 살아 숨쉬는 하느님을 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토착화는 필요조건이 아닌 필요충분조건이라는 설명이다.
에밀 주교는 토착화와 함께 캄보디아 교회의 과제로 자국인 사제와 수도자 양성, 성전 건축 등을 들었다. 과거 공산정권에 의해 자국인 사제와 수도자가 모두 살해 당했고, 성당들도 파괴됐기 때문이다.
어려운 여건. 하지만 에밀 주교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최근들어 각 본당에서 다양한 사목적 시도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신자 수 및 수도 성소가 증가하는 등 몇몇 희망적 징후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캄보디아에 도움이 되는 종교라는 긍정적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에밀 주교는 또 “캄보디아 교회도 한국교회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시작하고 있다”며 캄보디아 교회에 대한 한국교회의 관심을 당부했다.
“최근 캄보디아에는 많은 한국인 선교사들이 와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과거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복음이 전해졌다면, 요즘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경이로운 일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아시아 선교의 큰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입니다.”
▨ 에밀 주교는
1935년 프랑스에서 출생. 30세가 되던 1965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캄보디아에 와서 11년간 사목하다가 1975년 공산 크메르루즈 정권이 들어서자 캄보디아를 떠났다. 1990년 캄보디아에 종교 자유가 생기자 다시 돌아왔으며, 2001년 주교로 서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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