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 사제는 봉사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신부님을 뵙고 의논할 일이 있는데, 사제관으로 전화를 드려도 연락이 안 되고, 또 평일 오후에 어렵게 시간을 내서 여러번 성당에 가도 그때마다 안 계셨습니다. 주일 미사 후 어렵게 뵐 수 있었는데, 바쁘다며 피하셨습니다. 사제는 평신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요. 서울, 익명 외 5명.
최근 본당 사목자와 불편한 관계를 문의해 오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질문을 접할 때마다 곤혹스럽습니다. 구체적이고 개별적 사례를 자칫 일반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질문이 많이 이어지고 있는 만큼 어떤 식으로든 대답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목자와 관련한 질문 내용들을 보면 천편일률적으로 첫머리에 '봉사직'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사목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마르 10,43-45; 1베드 5,3 참조).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도 「사제직」에서 사목자들에게 "양떼를 잘 보살피는 것이 주님께 대한 사랑의 증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목자는 본당에 상주하며(룗교회법전룘 제 1396조 참조), 수품 때 결심을 잊지 않고 평신도 한명 한명의 영적 상태에 온 정성을 다해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교황 비오 11세 회칙 룗가톨릭 사제직룘 20항).
그러나 이런 정신에 따라 '내가 완벽하게 사제직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할 성직자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마치 스스로 죄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권능이 성직자들의 모든 행위를 동일하게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적 약점들 때문에 복음에 대한 표지가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룗가톨릭 교회 교리서룘 1550항).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사제를 '내 뜻'과 맞지 않는다고 공식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봤을 때 옳지 못합니다. 우선 그 판단이 상당히 개인적이고 작위적일 수 있습니다. 비판 이전에 중요한 것은 일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린 일치하도록 불리었습니다(룗교회 헌장룘 3항 참조). 일치하려면 사랑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사목자가 내 요구에 반드시 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사목자와 교회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내가 과연 어디에 있었는지 묵상하는 것이 먼저일 것 같습니다.
[가톨릭과 교리]/가톨릭교리
사제직
<자문=서울대교구 교회법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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