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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성서의인물(구약)

[1] 새로 쓰는 아담 이야기

by 세포네 2005.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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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아담 이야기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 “내가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 열매를 먹었느냐? 아담은 겁이 나서 핑계를 댔다. "바로 저 여자 때문이에요. 저는 안 먹으려고 했는데…."
이번엔 하와가 뱀에게 미루었다. "저 더러운 뱀이 먹으라고 했어요. 저는 억울해요. 완전히 속은 거라구요" 하느님은 이들에게 벌을 주셨다. 뱀은 저주를 받아 땅을 기어다녀야 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보따리를 꾸려 쫓겨났다.

아담은 입에 풀칠하기 위해 힘든 노동을 해야 했다. 하와는 아기를 낳을 때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걱정이 되어 두 사람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셨다. ○ ○ ○ ○ 아담과 하와의 모습은 어쩌면 이렇게 우리와 똑같을까. 잘못했을 때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보다 그 허물을 남에게 뒤집어씌우려는 못된 마음 말이다.

살아가면서 유익한 것은 내 능력이나 노력으로 쉽게 돌리지만, 불리한 것은 남의 탓이나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런 경향을 이기적 편향(Self―serving bias)이라 했던가.

그렇다. 늘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이다. 보통 때는 모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무의식 저편에서 꿈틀대며 고개를 내미는 이기적인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하느님의 추궁에 아담은 즉시 대답했다. “저 여자가 따주는 것을 그냥 먹었을 뿐입니다. 저는 눈곱만큼도 생각이 없었는데….
" 과연 그랬을까? 사실 이 대답엔 더 심한, 다른 의미가 숨어있다.

“하느님, 저는 잘못이 없습니다. 저 여자, 하느님이 만들어 짝지어 준 저 여자 때문이에요. 저런 여자를 만든 하느님도 솔직히 할 말이 없다구요…."

아담은 하느님도 잘못이 있다고 치받는다. 아담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셈이다.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왜 나를 이 모양으로 낳으셨어요. 누가 저를 낳으라고 했어요"라며 부모 마음에 대못을 박는 것과 같다.

여자도 뱀에게 핑계를 댔다. “저는 하느님이 만드신 뱀에게 속았을 뿐이에요."

속인 놈이 나쁘지, 속은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느냐라는 심사다. 내친 김에 뱀도 어떻게 변명했을까 상상해 보자. “저는 할 말이 없네요. 그저 저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왜 우리의 삶은 변명과 핑계로 일관되어 있을까? 왜 네 탓만 존재하고 내 탓은 찾아보기 힘든 걸까? 이런 추한 모습이 인간의 본래 모습일까?

아니다.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과 마음 속에는 분명히 정반대의 모습도 존재한다.

“하느님, 죽을죄를 졌습니다. 모든 것은 저의 책임입니다. 그러니 하와에게는 죄를 묻지 마십시오."

“아닙니다. 하느님, 제 남편 아담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제가 욕심이 많아 죄를 지었습니다. 저를 벌해 주십시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핑계와 변명하는 삶도 있지만, 당당하게 책임지고 용서를 구하는 삶도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본래 마음은 책임과 용서의 마음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주위에는 실패와 좌절만 있지 않다. 성공과 승리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또 실패하지 않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실낙원(失樂園)의 창세기가 아닌, 용서와 사랑의 창세기를 새로 써야 한다. 우리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참인간성, 그것을 길어내어 본래 우리의 본성을 회복해야 한다.

아담과 하와의 실패담을 기록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 실패를 모델 삼아 이를 반복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다.

이제 우리 앞에는 삶의 문제와 함께 해답도 주어졌다. 문제를 풀어 가는 것은 나의 몫이다.

“하느님, 저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이의 탓이라고 원망했던 적도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건 제가 잘못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닌,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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