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일은 성소가 주제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에는 성소를 살아가는 사람들로 주제를 잡았습니다.
이렇게 주제를 잡은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사무엘이나 주님의 첫 제자들뿐이겠냐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누구는 귀하기에 부르시고
누구는 보잘것없는 자이기에 부르지 않으시는 분이 아닐 거라는
저의 믿음 때문이고 오늘 사무엘기의 다음 언급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드러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어린 사무엘처럼 신앙적으로 어리기에
하느님께서 부르시는데도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줄 모르는 사람이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불러주셔서 사는 것임에도 성소인 줄 모르는 채
살 수 있겠다는 성찰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수도 생활이나 사제 생활은 성소라고 생각하지만
결혼 생활도 성소인 줄은 모르고 살 수 있고 그래서 성소를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부부들처럼 부부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도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종종 성소를 살지 않습니다.
수도원 처음 들어올 때는 분명히 성소가 있어서 들어왔다고 생각하지만
사는 동안 성소를 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수도원은 하느님께서 불러주셔서 들어왔는데
정작 수도원에서 들어와서는 성소 의식이 없이 형제들과 사는 것이고,
이는 마치 수도원 성소는 있는데 수도 생활 성소는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주님께서 나에게 형제들을 주셨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니 프란치스코와 같은 성소 의식을 가지고 산다면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형제는 내가 선택한 형제이거나
관구장이 보내서 온 형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형제이며,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나도 부르시어 형제들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소를 산다면 형제가 내 맘에 드느니 마느니 그것이 중요하지 않고,
왜 주님께서 이 형제를 내게 보내주신 뜻이 나에게는 무엇이고,
그에게는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살 것입니다.
형제를 나에게 주시고, 나를 형제에게 주신 것은 서로에게로 향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하여 같이 가라고 동반자와 도반으로 주신 겁니다.
왜 우리가 공동생활을 하고, 힘들어하면서도 왜 굳이 공동생활을 합니까?
가까운 길, 쉬운 길은 혼자 가는 것이 편하고 좋지만
먼 길, 힘든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같이 가야 하기에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그러라고 형제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구름 기둥과 모세가 있었듯이 따라가야 할 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이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 성소의 식별자요 스승이 필요합니다.
사무엘에게 엘리, 안드레아와 제자들에게 세례자 요한과 같은 존재입니다.
아직 신앙이 어리기에 나에게 어떤 성소가 있는지,
누구를 따라가야 하는지 알려줄 스승이 필요한 것이지요.
클라라는 프란치스코를 이 길을 알려준 분이라고 하며 이렇게 회고합니다.
"베푸시는 분이신 자비하신 우리 아버지께 우리가 받았고 또 날마다 받고
있는 여러 가지 은혜 가운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아버지께 더욱
깊이 감사드려야 하는 것은 우리 성소입니다. 이 성소가 그토록 완전하고
위대한 것인 만큼 우리는 그분께 그만큼 더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에게 길이 되어 주셨고, 그분을 참으로 사랑하고
본받은 이셨던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께서 말과 모범으로
이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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