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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성미술이야기

그리스도의 고난과 신뢰

by 세포네 2016. 4. 3.


벨라스케스, <채찍질 당한 후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응시하는 그리스도>, 1630년경, 내셔널 갤러리, 런던


예수님 수난의 주제인 “채찍질을 당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을 수세기에 걸쳐 많은 화가가 그렸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겪은 육체적 고통의 모습이 자주 나타났다. 그러나 스페인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의 작품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육체적 고문보다는 예수님의 인내의 참된 가치와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더 초점을 두었다. 벨라스케스의 ‘채찍질 당한 후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응시하는 그리스도’라는 긴 제목의 작품은 ‘기둥에 묶인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기도’, 그리고 성녀 비르지타가 어렸을 때 예수님 수난을 체험한 신비 때문에 ‘성녀 비르지타의 환시’로도 불렸다.

 바닥에 널려 있는 채찍 도구들로 보아 예수님께서 막 채찍질 당하신 뒤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그림 왼쪽 끝에 단단하게 세워진 커다란 돌기둥에 두 손이 묶인 채, 한가운데를 바라보며 지친 몸을 겨우 지탱하고 앉아 계신다. 비록 예수님께서는 모진 채찍질을 당하신 후라 매우 지쳐 보이지만, 어떤 사람보다 수려한(시편 45,3) 아름다운 몸을 보이고 있다. 벨라스케스는 이탈리아를 다녀온 후, 여러 대가와 고대 작품을 연구하며 인간 형상을 다루는 데 최고조의 능력을 발휘한다.

 채찍질을 당하신 예수님을 표현한 장면에 대부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문자들이다. 그러나 벨라스케스는 고문자들 대신 어린아이를 등장시킨다. 예수님의 수난 장면에서 매우 보기 드문 등장인물이다. 어린아이는 순수함의 상징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깨끗한 눈과 마음의 순수성이 예수님의 무고함을 증명하고, 이 어린아이만이 예수님의 고통을 진정 이해하는 듯하다.
 
 한편 그림의 제목에서 살필 수 있듯이 아이는 그리스도인(믿는 사람들)의 영혼을 나타낸다.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수호천사의 인도로 이미 예수님의 피땀으로 얼룩진 기둥과 앞에 놓인 고문 도구들을 바라보며 수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채찍질을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담긴 작품을 바라보며, 우리는 수난의 고통을 공감하며 그리스도의 고통을 체험할 수 있다. 

 무방비 상태로 앉으신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아이를 향해 보호받기를 원하시는 듯하다. 천사는 어린아이에게 “보아라.” 하고 말하는 것처럼 채찍질을 당하신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힘없고 고통스러운 얼굴에서 어린아이의 가슴으로 한 줄기 빛이 스며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하느님의 요구에 순종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럽지만, 하느님께서는 결코 자신을 저버리지 않으리라는 깊은 신뢰심을 가지고 있다.

 고통 속에서도 저버리지 않는 순종과 신뢰! 예수님 구원의 힘에 담긴 “너비와 길이, 높이, 깊이”는(에페 3, 18) 예수님께서 당하신 난폭한 육체적 폭력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느님과의 관계에 온전히 쏟아부으신 사랑의 깊이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다.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히브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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