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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성미술이야기

용서와 위로의 손

by 세포네 2016. 3. 6.


렘브란트 <돌아온 탕아>, 1668-69년, 캔버스에 유채, 262*205cm, 에르미타슈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에게 작은아들은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했고,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작은아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자기 재산을 모두 방탕한 생활로 탕진해 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어 버렸다. 다른 방법이 없었던 그는 당시 모두가 혐오하는 돼지치기를 했다. 돼지가 부정(不淨)한 짐승이었기 때문이다. 돼지와 더불어 비참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그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작은아들은 더러운 속옷 같은 누더기 차림으로 육체는 쇠약해지고 먼 길을 오느라 신발은 다 닳아 버렸다. 거기에 머리는 거칠게 빡빡 깎여 있다. 그야말로 그의 생활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를 보여준다.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의 잘 알려진 <돌아온 탕아>는 굶어 죽을 지경이 되자 집으로 돌아온 작은 아들을 아버지가 안아주는 장면이다.

 나이가 든 아버지는 길 위에 작은아들이 나타나자마자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는다. 돼지를 치다 온 더럽고 추한 아들이라 손대기도 싫었을 아버지, 방탕한 생활로 죄에 젖어 있었던 아들이라 두들겨 때려도 성이 풀리지 않을 아버지이지만, 그러나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부드럽고 온유한 모습으로 안아주고 있다. 아버지는 두 손을 지친 아들의 어깨 위에 얹어 지쳐서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고, 아버지의 커다란 붉은 색 망토는 아들을 감싸며 보호하려 한다.

 아버지의 왼손과 오른손은 서로 다르다. 왼손은 힘줄이 강하게 발달한 남자의 손으로 손가락들이 펼쳐져 아들의 등을 넓게 감싸고 있다. 왼손은 강인한 아버지의 손이다. 그러나 오른손은 부드럽고 섬세한 손으로 손가락들이 모여 아들의 등에 살포시 놓여 있다. 오른손은 위로하는 어머니의 손이다. 더욱이 거의 감겨 있는 아버지의 눈은 밤낮을 지새우며 언제 올지 모르는 아들을 기다린 시간을 말한다. 아들을 생각하고 기다리며 더욱 유약해진 것이다. 아버지는 제대로 아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육체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돌아온 아들을 어루만지고 있다.

 아버지와 작은아들의 재회를 바라보며 오른쪽에 꼿꼿하게 서 있는 큰아들은 이러한 감격과 용서의 순간을 부당하게 생각한다. 순종적이고 책임감 있게 열심히 일한 그의 못마땅함은 그가 쥐고 있는 권위를 상징하는 지팡이와 닫힌 마음을 보이는 경직된 손, 섭섭함을 드러내는 꽉 다문 입술 등에서 나타난다. 그의 표정은 차갑고 싸늘하며 신체는 어둠에 가려져 있다. 반면, 아버지의 얼굴에는 빛이 가득하고, 그 빛은 작은아들의 몸에 퍼져 따스함이 느껴진다.

 아들이 돌아올 그 길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쇠약해져 눈조차 보지 못할 지경에 이른 아버지의 모습에서,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온 작은아들처럼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렘브란트는 마치 하느님의 품에 안긴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더구나 작은아들의 얼굴과 밀어버린 머리는 갓 태어난 아기의 모습이다. 하느님의 품에서 다시 태어난 한 사람의 모습과도 같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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