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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여행이야기

유럽여행 9일째날 (1) - 루브르 박물관

by 세포네 2013. 12. 29.

오늘 아침은 조금은 여유가 있는 날...

멀리 가지 않고 바로 시내로 들어가 루브르 박물관 관람, 브렝땅 백화점 쇼핑, 몽마르트 언덕...

그리고 이번 여행의 마침표를 찍고 이제 고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하는 일정만을 남겨 놓고 있다.

 

아침을 간단하게 해결하고 늘 그랬듯이 커피, 빵, 컵라면... 이제 루브르 박물관으로 향한다.

 

루브르 박물관
세계 3대 박물관 중의 하나인 루브르 박물관은 그 소장작품 숫자가 약 40만점에 이르고 한 작품에 1분씩 관람한다 해도 4개월을 꼬박 보내야만 한다고 한다.

1793년 프랑스 혁명정부가  국립중앙미술관을 설치·공개했다. 루브르는 2개의 4각형 본관과 그것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2개의 커다란 정원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물 복합체이다. 1980년대에 들어 루브르는 방문객들의 접근과 편의에 더욱 이바지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축작업을 개시했다.
이로써 강당, 관광버스 주차장, 식당, 사무실, 상점, 전람실, 창고, 주차장 등을 수용한 거대한 지하단지가 나폴레옹 궁과 카루젤 궁의 중앙 정원 밑으로 조성되었다.
이 단지로 들어서는 지면 높이의 입구는 나폴레옹 궁 중심에 있으며, 그 위쪽에 미국 건축가 I.M. 페이가 디자인한 강철과 유리로 된 피라미드가 자리잡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은 루브르 궁전 내부에 위치해있다. 루브르 궁전은 12세기 후반 필립 2세의 명으로 착공되었는데, 그당시만 해도 궁이 아닌 요새였다.

아직도 당시의 요새 잔재들을 볼 수 있다. 이 요새가 루브르 궁이 되기까지 수차례에 걸친 건물 확장 공사가 이루어졌다. 1672년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에 거주하기로 결정하고 루브르를 왕실의 수집품을 전시하기 위한 장소로 쓰도록 했다. 건물의 시초는 12세기에 앵글로 노르만족의 침입을 막고자

성을 축조하게되었고 그 후 14세기 후반 햐를 5세에 의해 다른곳에도 성을 쌓고 이곳은 왕실건물로 개조를하였다.

 

↑ 루브르 박물관 입구

 

↑ 박물관으로서의 루브르는 1793년 8월 10일 537점의 회화를 전시하며 첫 문을 열었는데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몰락한 귀족과 교회에서 징발된 수집품들이었다.
박물관 건물 내부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박물관이 1796년에서 1801년까지 문을 닫았다

 

 

↑  이곳의 많은 유물들은 나폴레옹에 의해 전쟁으로 노획한 전리품으로 숫자가 셀수없이 많다. 결국은 다른 나라들의 보물을 프랑스로 가져와서

공개적으로 관람할 수 있게한 숨은 공로자(?)가 나폴레옹인셈이다. 그 전에는 왕들의 예술품으로 채워져있었다.

↑  파리에 있는 12세기 존엄왕 필리프 요새지(要塞地) 오른쪽 기슭에 지어진 커다란 궁전의 일부이다. 1546년 예술품 수집가 프랑수아 1세가
이 낡은 성곽을 부수고 그 터에 새로운 왕궁인 루브르 궁전을 짓기 시작했으며 뒤이어 거의 모든 왕들이 증축해왔다.

오늘날의 루브르 중 일부는 프랑수아 1세 때 건축가 피에르 레스코의 감독하에 완성되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카레 궁 남서쪽 부분이며,

대부분의 루브르 건축시설은 그뒤 17세기 루이 13, 14세 때 추가 조성된 것이다.

 

 

 

↑  밀로의 '비너스'상
이것은 밀로스 섬에서 1820년 뱔견 된 비너스 상으로서 뱔견 당시 원래부터 팔이 없었다.
밀러의 비너스는 작자 미상인 조각상으로BC 2∼1세기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각상의 기단부에 아가산드로스,

혹은 알렉산드로스라는 조각가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확인할 방법이 없어 작자 미상으로 남겨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발굴 당시 이미 두 팔이 손상된 상태였지만 동세나 근육의 모양으로 미루어,
파손된 한 손으로는 흘러내리는 옷자락을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또 다른 손은 '파리스의 심판'에 등장하는 금사과를 쥐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어진다고 한다.
비너스상은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데 허리와 엉덩이 둘레가 1:1.684인 황금비례와 일치한다고~

 

 

루브르 박물관의 회화 소장품은 13세기부터 1848년까지의 작품들로 약 6,000점 이상이며 소장품의 전시를 총괄하는

 12명에 이르는 큐레이터에 의해 관리된다. 이중 약 2/3는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이고 약 1,200점 이상이 북유럽 작품이다.

이탈리아 회화는 대부분 프랑수아 1세와 루이 14세의 유품으로 남겨진 소장품들로 구성되었고

몇몇은 나폴레옹시대의 전리품으로 들여왔다가 그대로 남은 것들이며 몇몇은 사들인 것들이다.

 

 

 

 

 

 

 

 

프랑스 미술품들 중에는 앙게랑 콰르통의 아비뇽 피에타, 장 푸셰의 King Jean le Bon 후고전시대 이래 남아있는
서유럽 작품중 가장 오래된 독립 초상화인 하시엔디 리고의 루이 14세,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등이 있다.

 

↑  다비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1804년 12월 2일 노트르담에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다비드의 거대한 그림은 바로 이순간을 다룬 것이다.

승리의 월계관을 쓴 나폴레옹의 호화로운 대관식 장면은 중세 유럽의 패자인 샤를마뉴 대제의 대관식을 연상케 한다.

혁명 이전에 쓰여진 국왕의 공문서는 " 신의 은총에 의한 프랑스의 국왕 ○○는....." 대개 이런식으로 서두가 시작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부르봉 왕가에서 쓰던 '국왕'이란 칭호를 '사자(死者)들의 영광'으로 간주하여 그 상속자이기를 거부하고

 대담하게 '황제'라는 칭호를 택했다. 그래서 대관식에 로마교황이 참가하도록 계획했음에도, 샤를마뉴 대제처럼 직접 로마에 가는 것이

아니라 교황을 파리로 초청했다. 뿐만 아니라 역대 프랑스왕들이 즉위식을 오렸던 랭스 성당을 기피하여,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성대한 식을 올렸다. 또 대관식이 거행되는 중에도 샤를마뉴 대제는 교황이 황제의 관을 씌워줄 때까지 가만히 앉아 기다렸는데,

나폴레옹은 교황에게서 관을 받아 제 손으로 머리에 쓴 다음 또 뒤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조세핀의 머리 위에도 제 손으로 관을 쓰워주었다.

이 거창한 대관식에 이어 축제는 궁정에서도, 파리에서도, 지방에서도 열 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 오달리스크 / 장 오퀴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이 여인은 터키의 궁녀로 당시 가장 정확한 데생력과 소묘실력을 과시하던 앵그르가
의도적으로 인물의 허리와 팔을 길게 왜곡하여 관능적으로 표현하였다. 같은 포즈의 오달리스크가 여러개 존재한다.

 

 

↑  모나리자(Mona Lisa) 또는 라 조콘다(La Gioconda, La Joconde)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초상화로,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모나"(mona)는 유부녀 이름 앞에 붙이는 이탈리아어 경칭이고, "리자"(Lisa)는 초상화의 모델이 된 여인의 이름이다.

즉, 한국어로 하면 "리자 여사"라는 뜻이 된다. 모나리자의 다른 명칭인 "라 조콘다"는 한국어로 "조콘도(Giocondo)의 부인"이라는 뜻이 된다.

뭐니해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가장 유명하게 알려져있다. 이 작품은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는 여인을 그린 초상으로,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사용하여 엷은 안개가 덮인 듯한 효과를 주고 있다.  구도는 당시에 가장 기본적인 초상화 구도였던

피라미드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인물을 배경보다 높이 배치하는 방식은 오늘날 화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드문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 그림에는 황금비율인 1:1.618의 비율이 상당히 많이 들어가있다. 코와 눈썹의 길이와, 턱과 코의 길이의 비율,

인중과 입술의 길이와 입술과 턱의 길이의 비율, 얼굴의 가로와 세로의 비율 등 황금비율이 많이 들어가 균형잡힌 느낌을 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02년에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조르지오 바사리의 말에 의하면 미완성작으로

남겨둔지 4년이 지난 후에서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  '가나의 결혼식'
루브르박물관엔 예수와 마리아의 그림이 여러점 걸려있다 그중에 유명한 그림은 16세기경 칼리아리 파올로 베르네네 작품인 '가나의 결혼식'유명하다.

가나의 결혼식 장면으로 상당히 큰 그림으로 가운데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캔버스에 유채 그림으로 666×990㎝크기이다.
신약성경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가 가나라는 마을의 결혼식에 초대되었는데 연회가 끝날 무렵 포도주가 다 떨어지자 성모마리아의 부탁을 듣고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했다고 한다. 이는 예수가 대중 앞에서 처음으로 일으킨 기적이자 그가 이후에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며

희생당할 것임을 암시하는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평범한 결혼잔치를 묘사한 것은 아니다. 성서적 주제를 담고 있어
신랑 신부는 화면 왼쪽에 앉아 있고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 중앙 후광에 싸인 예수 그리스도가 앉아 있으며 그 옆에는 성모 마리아와
제자들이 앉아 있다. 잔치의 중심에 앉아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단순한 옷차림이 화려한 복장의 하객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화려한 장식이 달려 있는 긴 옷을 입은 남자들은 베네치아 상류층을 나타낸다. 또한 터번을 쓴 사람, 동양인 등 다양한 사람들은 상업이 발달해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당시 베네치아를 나타내고 있으며 자수가 놓인 식탁보, 진귀한 도자기 등은 거래되었던 무역상품들을 의미한다.

인물들 사이에 있는 하인, 광대, 동물들은 결혼식의 호화로움을 강조한다. 화면 중앙에 있는 4중주 음악가들은 당시 베네치아의 유명한 화가들이다.

티치아노는 비올레네, 틴토레토는 바이올린, 바싸노는 코넷, 베로네세 비올라를 연주하고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아랫쪽 음악가들 사이에 놓여 있는 모래시계는 물질적인 쾌락은 순간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식탁 위에 놓은 음식들 들 사이에 음료가

가나의 기적을 암시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을 나타내고 있는 사람이 화면 오른쪽 맨 앞에 노란 옷을 입은 노예다.

이 작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식탁 중앙에 그려 넣으면서 최후의 만찬을 암시했으며 예수 그리스도 머리 위로 하인들이 잔치에 쓸 고기를
자르고 있는 모습은 후에 있을 예수의 고난을 나타냈다. 파올로 베로네세는 이 작품에서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않고 실제의 사건처럼 화려하게 구성했다.

등장인물이 100여명이 넘는 이 작품은 베네치아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인 산 조르지오 마조레 식당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했다.

↑ 그는 손님을 위해 물병을 따르고 있지만 옆에 남자가 물병에서 포도주가 나오는 것으로 보고 놀라고 있다. 이 장면이 가나의 기적을 상징한다.

↑ 예수 그리스도를 식탁 중앙에 그려 넣으면서 최후의 만찬을 암시했다

 

 

메두사의 뗏목 / 테오도르 제리코

19세기 초 아프리카 식민지를 개척 할 목적으로 프랑스는 군함 3척을 마련하였습니다.  정부는 군함을 지휘할 함장을 선발하였고, 

3척의 군함중 "메두사호"의 함장은 귀족출신에 항해 지식이 부족한 무능력한 인물이었죠.  그리고 불행하게도 1816년 7월 2일,  

세네갈을 향하여 항해하던 도중 아프리가 연해에서 메두사 호는 난파 당하고 맙니다. 배에 타고 있던 400여 명의 인원 중

149명만이 급조된 뗏목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구명정에 이 뗏목을 연결시켜 끌고 가던 도중,

비겁한 함장은 자신만의 안전을 위하여 뗏목에 연결된 밧줄을 끊고 달아나 버리죠. 이들은 무려 12일 동안 난파당한 채로 바다를 떠다니게 됩니다.

남은 사람들은 추위와 공포, 그리고 굶주림과 싸워야 했으며 149명의 인원 대부분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과 같이 출항 했던

‘아르귀스호’에 의하여 구출은 되었지만, 구조되는 순간 5명이 죽었으며 나머지 생존자들도 정신이상증세를 보였다고 해요.

살아남은 사람은 15명. 배에 타고 있던 400명에 비해 턱없이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생존한 것입니다. 이후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가던 이 사건은

당시 생존자 중 의사였던 자가 충격적인 고백을 하면서 다시 수면위로 올라오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배고프고, 목이 마르고, 굶주림에 지친 조난자들이
죽은 동료의 인육과 피로 연명을 했다는 증언이었죠. 제리코는 이 희대의 사건을 모티프로 <메두사의 뗏목>을 탄생시켰습니다. 

제리코는 이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생존자를 찾아다니면서 취재하고 시체안치소에 찾아가 시체를 연구하기도 했다고 해요. 
  이 작품은 당시 구조되기 직전의 절박했던 사람들의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 앗시리아 왕이 자살 직전의 모습을 그린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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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 관으로 들어선다.

  ↑ "반항하는 노예상"

 

"죽어가는 노예상"
해부학에 능한 미켈란젤로는 대리석 속에 갇힌 인간을 조각을 통해 해방시킨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당시의 신분제도하에서 노예는 죽음으로서만 해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인데
그래서인지 노예상이지만 아주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 큐피트가 연인인 프쉬케를 키스로 살려내려고 하는 장면

↑ 프쉬케와 큐피트 / 안토니오 카사노바, 1793년

큐피트가 죽음의 잠에 빠져있는 사랑하는 그의 연인 프쉬케를 키스로 깨우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라고 한다. 결국 큐피트는 키스로 프쉬케를 살려내고

제우스신의 허락을 받아 결혼해서 프쉬케를 닮은 예쁜 딸 볼푸타스를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그리스 신화를 근거로 만든 작품

 

↑ 피라미드 주위는 끊임없이 물이 흐르는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고, 작은 피라미드는 분수와 어울려 중양의 피라미드와

절묘한 음, 양의 조화를 창출하고 있다. 건축가 Pei는  장엄한 분위기의 구의 외모에 손상을 끼치지 않도록 가볍고 투명한 구조를 응용하였다고 한다.  

빛과 볼륨이 건축의 기본 요소가 되었다고 한다.

 

 

↑ 나폴레옹의 '카루젤 개선문'
이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오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승리한 공적을 위해 1808년 만들었으며 로마의 개선문을 본 따 만들었다.
새겨져있는 부조의 내용은 승리에 대한 내용들로 되어있다. 그리고 개선문위에 4마리의 기마동상이 얹혀져있는데
이탈리아 베네치아 싼 마르코 대성당 현관위에 있는것을 가져다가 올려놓았다.

 길이 220m, 폭110m의 나폴레옹 뜰과 기하학적 측면에서 가장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규모는 피라미드 형태이며,

이것은 바로 순수기하학적 형상이면서 가장 적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변의 길이가 30m, 높이가 21.6m, 각도 50.71°로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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