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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가보고싶은 성당

[대전교구] 서산 동문동성당 및 상홍리공소

by 세포네 2007.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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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더더기 없이 절제된 건축미 돋보여

본당과 공소 모두 등록문화재로 등재
[본당] 1937년 완공…단순 명료한 고딕건물
[공소] 바실리카 양식에 한옥기법 접목

▲ 수호천사 성당인 서산 동문동성당은 소박하다. 군더더기 없이 지극히 절제된 건축 어법으로 지어져 1930년대 교회 건축의 아름다움을 함축하고 있다. 전대식 기자 jfaco@pbc.co.kr

 

   내포(內浦)의 가을은 단풍으로 지천이다. 어느 길을 달려도, 만추의 들녘은 눈이 부시다.

 내포교회(대전교구)의 다섯 번째 성당인 서산 동문동성당(주임 배승록 신부)에 도착하니, 성당 경내 또한 낙엽으로 덮여 있다.

 부춘산 능선을 따라 마당 끝에 우뚝 선 성당은 청명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안긴다. 성당에 가을 햇살이 얕게 비껴들어 두 그루 벚나무와 낙엽이 어우러지는 풍경 속에 깃드니 만추의 서정이 사무친다.

 지난 4월 30일 등록문화재 제321호로 등재된 서산 동문동성당은 바실리카 평면 구조에 입면은 장식을 지극히 간략화시킨 고딕 양식 교회건축이다. 장미창 하나 없고 그 흔한 벽돌 성당도 아니다. 시멘트 블록으로 쌓아올려 그 흔적을 시멘트 덧칠로 가린 맨살 그대로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지극히 절제된 성당이다.

 하지만 그냥 그대로의 단순 명료하고 꾸밈없는 아름다움이 이 성당을 1930년대 교회건축의 독특한 유산으로 남게했다. 1937년에 완공했으니 올해로 70돌을 맞지만 끄떡도 않고 버텨내고 있다.

 물론 몇차례 보수를 거쳤다. 1957년에는 제대ㆍ제의실쪽 공간을 99.17㎡(30평)이나 증축, 전체 성당의 3분의 1가량을 새로 짓다시피 했다. 2006년 6~7월에는 성당 내부 열주(列柱, 줄기둥)와 마루, 성가대석 등 성당 안팎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그래도 성당 내부는 옛 모습을 살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둥근 천장과 신랑(nave)과 측랑(aisle)을 나누는 열주, 제대 등은 옛 정취 그대로다.

▲ 지난 7월 새로 조성된 성당 뒤 바로 동산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치명자의 모후' 쁘레시디움(단장 변인숙 요세피나) 단원들.

 

 교구 서산지구장좌인 동문동성당을 거론하면서 4대 주임인 파리외방전교회 바로(P. Barraux, 1932.7~1946 재임) 신부를 빼놓을 수 없다. 서산시 동문동 665-5번지 현 부지에 성당을 지은 신부가 바로 신부다.

 바로 신부는 1935년 해미 하천변에 생매장돼 있던 병인박해(1866년) 순교자들의 유해를 증인들의 고증에 따라 3개소에서 발굴 수습해 상홍리 순교자묘역(1995년 해미성지로 원상 복구)에 이장해 서산 동문동본당 공동체에 순교신심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특히 1946년 1월초 바로 신부는 열병으로 사경 중에 있는 신자에게 병자성사를 주고 영성체를 하던 중 환자가 성체를 뱉자 이를 대신 영하고 전염병에 감염돼 선종했다. 붉은 단풍 만큼이나 붉은 신심이다.

 이런 신심을 새기며 성당을 돌아보는 만추의 여정은 숙연하다. 성당 뒤편으로 돌아가면 지난 7월 새로 조성한 '바로 동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바로 신부의 이름을 따 조성한 동산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얕은 언덕배기에 배치돼 있다. 그 한 가운데 바로 신부 묘비와 6ㆍ25 전쟁 때 공산군에게 체포돼 압송되던 중 폭격을 당해 행방을 알 수 없는 콜랭(J. colin, 1948~1950.9 재임) 신부 추모비가 있다.

▲ 서산 동문동본당 공동체는 1956년 해미 서문 밖 다리로 쓰던 순교돌 자리개돌을 성당 경내로 옮겨왔다가 1986년 원래의 자리인 해미 서문 밖으로 되돌려준다. 이에 본당은 1987년 본당 설립 70주년을 맞아 자리개돌이 있던 자리에 기념비를 세우고 순교자들의 영광을 기린다. 기념비 앞에는 현재 형구돌이 놓여져 있다.

 

 바로 동산을 내려와 성당 앞으로 돌아오면 1956년 해미 서문 밖에서 옮겨온 순교돌 '자리개돌'(1986년 다시 해미성지로 옮김)이 있던 자리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순교자들의 피가 배 있는 듯한 형구돌이 하나 올려져 있다. 순교자들의 목에 밧줄을 맨 뒤 형구돌 가운데 구멍으로 줄을 잡아 당겨 사형을 집행했다는 형구돌에는 아직도 피가 배어 있는 듯 붉은 흔적이 남아 있다.

 본당 설정 90주년을 맞은 동문동성당의 뿌리인 상홍리공소 또한 지난 7월 3일자로 등록문화재 제338호로 등재돼 본당과 공소가 함께 등록문화재에 등재되는 겹경사를 안았다.


▲ 서산 동문동본당의 뿌리인 '상홍리공소' 앞 모습으로, 전면부 상단에는 종탑이 설치돼 있다.

 

 금학리에 이어 두 번째로 들어선 본당 자리인 상홍리공소는 2대 주임 폴리(D. Polly, 1919.10~1921.7 재임) 신부가 부임해 1919년에 지은 전통 한옥 성당이다. 바실리카 평면 구조에 한옥 건축 기법을 살려 지은 성당답게 토착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공소 전면부에는 1986년에 고 백남익 몬시뇰과 고 임진창 전 서강대 교수가 500만 원을 지원해 복원한 종탑이 세워져 있다. 마치 사찰 일주문 같은 양식 종탑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일품이다. 그 앞에는 1919년 성당 건립 당시 붙였다는 '천주당(天主堂)' 간판이 걸려 있어 시선을 끈다.

▲ 일제강점기 당시 상홍리공소 모습. 사진은 당시 농번기에 동네 아이들을 데려와 탁아소를 운영하는 장면으로, 사진 아래에는 일제 연호인 소화 13년(1938년) 6월 27일이라는 날짜가 명기돼 있다.

 

 백남석(다마소, 75) 공소회장의 안내를 받아 성당에 들어서자 고풍스러운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제단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상을 중심으로 성요셉과 예수성심 성화가 좌우로 걸려 있고, 옛 제대와 현 제대가 나란히 공존한다. 또 십자가의 길 14처, 남녀로 나눠 고해성사를 줬다는 고해소, 무릎틀(장궤틀) 등도 옛 신앙의 향기를 고스란히 전한다.

▲ 상홍리 공소 백남석 회장이 성당 내부 성모상과 성화, 제대 등을 가리키며 공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모두가 건립 당시 폴리 신부가 프랑스에서 들여온 성물로, 하나하나가 신앙의 이력서를 보는 듯하다. 성당을 나와 뒷산 병인년 해미 순교자 묘소와 6ㆍ25 전쟁 당시 공산군에게 학살 당한 백낙선(사도 요한, 1896~1950) 전 동문동본당 회장 묘소에 들러 짧은 추모 기도를 바치고 나니 가을 들녘 오후 해가 기운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 대전교구 서산 동문동성당 및 상홍리 공소 약도

 

▨서산 동문동성당 및 상홍리공소 가는 길

▲서산 동문동성당=서해안고속도로 서산나들목을 나와 좌회전, 32번 일반국도를 타고 서산시내까지 12㎞를 진행한 뒤 애향3거리에서 우회전, 동문동 4거리에서 우회전, 새로 도로를 내고 있는 교차로에서 좌회전하면 오른쪽에 성당이 보인다.

▲상홍리공소=동문동성당에서 다시 32번 일반국도를 타고 서해안고속도로 쪽으로 진행하다가 수석교차로에서 좌회전, 상홍리로 들어가면 된다. 동문동성당에서 6.8㎞ 가량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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