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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가보고싶은 성당

[춘천교구] 홍천성당

by 세포네 2007.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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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미 뛰어난 1950년대 석조 성당의 전형 "

[근대문화유산] 춘천교구 홍천성당(제162호)

  

▲ 1) 홍천 읍내를 굽어보는 석화산 기슭에 우뚝 서 있는 홍천성당. 주변 풍광은 변했지만 겨울이면 더욱 파란 하늘빛은 변함이 없다. 전대식 기자 jfaco@pbc.co.kr

 
  어느 신부가 들려준 강원도 홍천성당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호주 출신 조 필립보(2005년 선종) 신부가 사목하던 1950년대 중반 어느 해 겨울이었다. 눈덮인 산골 성당에 미국에서 보내준 구호물품이 도착했다. 옷가지 속에 여성 브래지어가 있길래 조 신부는 그걸 한 아주머니에게 줬다.

 그런데 맙소사! 주일미사때 한 할아버지가 그 희한하게(?) 생긴 물건이 귀마개인줄 알고 머리에 칭칭 두르고 성체를 받아 모시러 나오는 게 아닌가. 조 신부는 성체를 분배하다 말고 배꼽을 잡고 웃었다.
 서양문물을 접해보지 못한 산골 신자들의 순박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에피소드다.

 ##1970년대까지 지역 랜드마크
 서울에서 차로 2시간 남짓 걸리는 홍천성당(주임 여성재 신부)은 더 이상 산골 성당이 아니다. 6ㆍ25 전쟁 후 현 석조 건물을 지을 때만해도 홍천 읍내와 화양강을 굽어보는 높은 위치였는데 지금은 앞뒤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1960~70년대 사진을 보면 읍내에서 언덕 위로 높이 솟은 건물은 홍천성당과 그 우측에 있는 군청 밖에 없었다.


▲ 정면에서 바라 본 홍천성당 종탑. 7년 전까지 종소리가 홍천 읍내와 주변 산간마을로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홍천성당은 1만5279㎡(4630평)에 달하는 넓은 부지가 인상적이다. 교구에서 주변 땅을 일부 매각했는데도 마당이 여느 초등학교 운동장마냥 넓다. 6ㆍ25 전쟁 전후 조 필립보 신부가 성골롬반외방선교회 본부와 고국 신자들이 보내준 돈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조금씩 매입한 것이다.

 한때 서석ㆍ내면ㆍ현리까지 관할했던 홍천본당의 뿌리는 성당에서 12㎞ 떨어진 송정공소(홍천군 화촌면 송정리)다. 송정리는 박해시대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들어와 터를 일구고 산 옹기촌으로 유명했다. 옹기촌 신앙 공동체는 본당으로 승격(1923년)될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읍내와 멀리 떨어져 있어 교세확장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1936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초기 목조 성당은 6ㆍ25 전쟁 중 폐허가 됐다. 최동오(마산교구 은퇴) 신부가 부임해 미군부대에서 미송과 시멘트를 얻어다 재건한 뒤 잠시 미사를 봉헌하다 윗터에 현 석조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미군부대 도움으로 성당 재건
 1955년 석조 성당이 완공된 뒤 강당으로 쓰인 목조 성당은 신자들의 행사장소뿐 아니라 홍천 주민들에게 유일한 문화공간 역할까지 했다. 볼거리가 없던 시절이라 신자들이 예수성탄대축일 전야에 성탄 연극을 공연하면 주민들이 모두 몰려와 관람했다고 한다. 그 시절의 빛바랜 공연 사진들이 교육관내 유물전시관에 걸려 있다. 신자와 읍내 주민들에게 크리스마스 겨울 밤의 추억을 남겨준 목조 건물은 1978년에 철거됐다.


▲ 신자들이 향나무 아래 양지바른 벤치에 앉아 성경을 읽는 모습이 평화롭다.

 최 신부는 전쟁 직후 궁핍한 시절에 성당을 짓느라 많은 고생을 했다. 홍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부대에 가서 건축기금을 얻어다 부지를 마련하고, 공병대를 찾아다니면서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중장비를 지원받았다. 돌은 미군부대 트럭을 동원해 성당에서 15㎞ 떨어진 삼마치 고개에서 실어왔다.

 또 서울 춘천 원주 등지에서 석공을 불러다 돌을 쪼고 다듬어 쌓아 올렸다. 마루와 창문에 들어갈 목재는 미군 공병대에서 얻어왔다.
 
    그러나 최 신부는 지붕공사가 남은 성당을 뒤로 하고 용소막본당으로 떠났
다. 이어 1954년 8월 조 필립보 신부가 부임했다. 1947~50년, 54~61년, 62~68년 3차례 홍천본당에서 사목한 조 신부는 성당 건축과 강원도 내륙지방 복음화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홍천을 중심으로 인근 면ㆍ리 단위 마을까지 걸어 들어가 공소 20여 개를 직접 지은 불굴의 선교사다.

 조 신부는 6ㆍ25 전쟁 때 인민군에게 체포돼 그 혹독한 '죽음의 행진'에 끌려갔다. 휴전과 동시에 본국으로 송환된 조 신부는 프랑스에 들러 큰 종을 사서 한국행 화물선에 부치고 홍천으로 돌아왔다. 현재 그 종이 종탑에 걸려 있다. 그 종소리는 2000년까지 하루 3번 삼종기도 시간에 맞춰 울려 퍼졌다.

 여성재 주임신부는 "몇 년 전 상태를 점검하느라 종을 쳤는데 주민들이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른다'며 무척 좋아했다"면서 "하지만 지금은 종과 종탑 사이 유격이 좁아 종을 칠 수 없는 상태라 아쉽다"고 말했다.


▲ 옛 목조 성당.

 # 호주 선교사 조 필립소 신부의 얼 서려 있어
 홍천 토박이 신자 용영철(갈디노, 78)씨는 건축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미군부대 도움으로 벽을 쌓고 지붕을 얹었다. 배고픈 시절이라 신자들은 밀가루 45㎏짜리 한 포대를 일주일치 노임으로 받고 일을 거들었다. 특히 봄철 보릿고개를 넘길 때는 조 신부님이 밀가루와 옥수수 가루를 다 풀어 아침마다 큰 가마솥 5개에 죽을 쒀서 주민들을 먹였다."

 성당 구내의 전체적 배치는 3단 구조다. 차량 출입구 좌측 양로원이 가장 낮고, 마당과 수녀원ㆍ강당ㆍ교육관 등이 두 번째 단이다. 맨 윗단에 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성당은 단층이다. 돌에 홈을 파서 끼워 넣는 식으로 외벽을 축조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성당 바닥 나왕마루는 50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멀쩡해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군데군데 '삐꺽' 거리는 소리가 나기는 해도 비교적 양호하다. 그 비결은 마루 아래 공간이 유난히 넓은 데다, 습기를 방지하려고 그 안에 새끼줄 타래를 깔아 놓은 데 있다.

 성당을 실측조사한 경동대 양관목 교수는 "미군들이 거의 다 지은 건축물이기에 건축학적 특성을 언급하기는 곤란하다"며 "그러나 동시대 건축물에 비해 구조가 튼튼하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점은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본당은 2005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후 지방자치단체 지원을 받아 한 차례 보수작업을 벌였다.

 정면과 측면 강화유리 문을 동판으로 교체했다. 창문에 부착된 스티커도 떼내고 스테인드 글라스를 입혔다. 그대로 놔뒀던 제단 벽면 바로 아래 제대(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에 사제가 벽을 바라보고 미사를 봉헌한 제대)를 철거하고 제단도 새로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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