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입, 출국 도운 관문
평북 의주군 의주읍 동외동 의주천주교회는 국경도시 의주를 사목구역으로 삼아 1911년에 본당으로 설정됐다. 물론 의주공소 공동체는 그 이전인 1899년 가을에 오스카 채플린(파리외방전교회) 신부가 설립했다. 의주는 박해시대 교회 밀사와 선교사들의 주요 출입 통로로 한국천주교회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뜻깊은 교회사의 현장 의주본당 공동체를 세차례에 걸쳐 조명한다. 사진제공=미국 뉴욕주 메리놀외방전교회 어씨닝 본부, 평양교구 설정 80주년 준비위원회
전대식 기자, 오세택기자
[혼인성사 마친 새 신부]
1926년 의주성당에서 막 혼인성사를 받고 나와 수녀원 아치형 현관에 선 새 신부. 예쁜 한복에 꽃관을 쓰고 머리 뒤쪽에는 긴 천을 드리웠다. 이를 이채롭게 포착해낸 메리놀외방전교회 선교사를 새 신부가 수줍은 표정으로 바라본다.
[의주성당]
조선 복음화의 관문, 의주에 성당이 세워진 것은 평양교구가 설정되기 17년전인 1911년 9월이다. 초대 주임 서병익(바오로) 신부가 부임, 14년간 사목한 의주본당 공동체는 1919년 10월 7일 새 성전을 세워 서울대목구장 뮈텔 대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한다. 평양(관후리)성당에 이어 평안남ㆍ북도에 세워진 두번째 성당으로, 수호자를 성모 승천으로 정했다. 당시 조선돈 1만여원을 들여 세운 의주성당은 적색과 회색 벽돌로 쌓은 성당으로, 평안도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성당 왼쪽에는 수녀원이 보이고, 오른쪽 새집 아래쪽에는 사제관 지붕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근처에는 누추한 기와집과 소 대여섯마리, 달구지, 그리고 주민들이 보인다.
[옛 의주성문과 수구문]
우리나라는 성의 나라였다. 온나라에 흙성(土城)과 책성(柵城) , 벽돌성(塼城), 돌성(石城) 등을 세워 외적 침입에 대비했다. 특히 압록ㆍ두만강변 2000여리 조ㆍ청 국경은 흙담 위에 통나무를 얹은 형태의 책성을 세워 경계를 삼았다. 이 책성의 통행문을 청의 변방에 있다해서 변문(邊門)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돌성엔 누각을 세운 정문과 별도 변문을 뒀다. 옛 의주성문(城門)과 수구문(오른쪽) 역시 같은 형태다. 이 중 수구문은 배수구 또는 하수구 역할을 했다. 1842년 10월 김대건 신학생이 3차례에 걸쳐 조선 입국을 시도하다 실패한 곳이 바로 이 의주 변문이며,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 등 숱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조선 복음화를 위해 드나들던 관문 또한 의주 변문이다. 1940년대까지 건재했던 의주성은 이제 메리놀회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을 통해서나 접할 수 있다. 의주본당은 교회사의 숨결을 기억하고자 해방 무렵까지 해마다 복자성월(9월 순교자성월)이면 변문을 찾아가 성월 기도를 바치고 복자 찬가를 부르며 순교자들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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