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승훈 베드로, 황사영 알렉시오
지난 주보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천 장수동은 이승훈이 참수된 후 안장된 곳이고, 인천 강화는 황사영이 탄생하여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이처럼 인천과 강화는 비교적 일찍부터 복음이 전래되었고, 천주교회 창설부터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700년대 후반 가톨릭을 전파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승훈과 황사영은 모두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순교하였다.
● 한국 천주교회의 선각자이며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의 묘가 있는 장수동 반주골
남동구 장수동 반주골에는 한국천주교회의 선각자요,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베드로)과 아들 신규, 택규의 묘가 있다.
이승훈은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 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해 신자 공동체를 형성하여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데 밑거름을 다졌다. 그러나 명례방 집회에서 관헌에게 적발되자 배교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배교를 후회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와 1801년 신유박해로 다른 6명의 교우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이승훈은 이 땅에 복음의 첫 번째 씨앗을 뿌린 선구자였다. 그로부터 시작된 신앙은 후손들에게 이어져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증손 이연구· 균구는 1871년에 각각 순교하였다.
1973년, 인천시 도시계획으로 선영의 묘는 시흥군 군자면으로 이장되었고, 이승훈과 그의 아들 신규, 택규 묘만 남게 되었다. 1981년 11월 28일, 이승훈 묘가 개봉되어 유해는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부분은 반주골에 남아 있다.
● 백서의 주인공 황사영이 탄생하여 유년기를 보낸 강화 대금동
황사영 생가터는 강화읍 월곶리 대금동에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다. 황사영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에 합격해 정조(正祖)는 그를 치하했다.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고 정약현의 사위가 된다. 처가 집안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전해 들은 황사영은 그 진리에 매료되어 주문모 신부에게 알렉시오라는 본명으로 영세한 후 주 신부를 도와 전교 길에 올랐다.
1801년 신유박해로 주문모 신부, 이승훈, 정약종 등 조선 교회의 핵심 지도자들이 순교하게 되자 황사영은 배론에 있는 토굴에 몸을 피해 그곳에서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써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黃沁)이 관헌에게 체포되고 황사영도 역시 관헌에게 붙잡혀 마침내 처참한 육시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처럼 강화 대금동과 장수동 반주골은 인천지역 가톨릭 역사와 관련하여 유서깊은 곳이지만 성지로서의 면모가 잘 갖추어져 있지는 않다. 하지만 안내 표지가 찾는 신자들에게 성지임을 말해주고 있으므로 방문하여 이승훈과 황사영의 신앙을 돌아보며 기도하고 인근 성당에 들러 미사에 참례하면 좋을 듯 하다.
사진) 황사영 생가터 추정지
인근성당 안내:
황사영 생가터 - 강화성당(933-2282),
이승훈 묘 - 만수1동 성당(464-0888)
찾아가는 길은 한국의 성지 홈페이지를 참조 바랍니다.
<정리: 홍보실, 참고: 인천교구사, 한국의 성지(www.pax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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