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 인천교구 전사
1.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복음의 전례부터 박해 시대의 인천
인천지역에 언제 첫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다만 이승훈 일가와 황사영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인천과 강화에는 비교적 일찍부터 복음이 전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인천은 한국 교회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이승훈이 참수 당하여 묻힌 곳이며, 이승훈의 아들 택규와 신규가 생활했고, 참수된 후 안장된 곳도 반주골이다. 또한 황사영이 태어나고 유년기를 보낸 곳이 강화 월곳리 대묘동이니, 인천과 강화는 일찍 복음이 전래되었고 천주교회 창설부터 깊은 관련이 있는 셈이다.
1791년 신해박해,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1871년 신미박해 등 근 백 년 동안 인천지역에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기해에 순교한 이들은 김성임(마르타), 심소사(발바라), 민극기(스테파노), 이군겸(야고보), 장아나스타시아, 병오박해 때 순교한 이는 우술임(수산나)이다.
병인박해로 참수 치명한 인천·강화 출신의 대표적인 치명자들은 박도섭, 박사앙, 이 안나, 심원경(스테파노), 김스타니슬라오, 심바오로, 권바오로, 박상손, 성연순, 우윤집, 원윤철, 조학경, 심봉학, 최순복 등이 있다. 이외에도 이 지역 출신은 아니지만 이 지역에서 치명한 증거자들도 많다. 최인서, 박순집 형, 조참봉 부친은 강화에서 치명, 손넓적이(베드로)와 그 아내, 사위 백치문(사도요한)은 제물포에서, 이마티아의 손자, 백용석, 이명현, 정씨여자, 이균규, 이돈호, 이이호는 인천에서 참수되었다.
1871년 마지막 박해로 인해 이승훈의 증손 이연규와 이균학, 이재겸의 아내 정씨 및 손명현, 백용석, 김아지 등이 제물진두에서 참수되었다. 이리하여 이승훈의 집안은 신미박해까지 4대에 걸쳐 6명이 천주교 때문에 처형당하였다.
<정리: 홍보실, 참고: 인천교구사>
▶▶▶인천교구는 1961년 6월 6일 인천대목구로 설정되어 2011년이면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습니다. 교구장 최기산 주교는 2007년 사목교서를 통해 교구설정 50주년을 잘 준비할 것을 특별히 당부하였습니다. 이에 주보를 통해 교구의 50년사를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갖으려 합니다.
이번주부터 시작되는 제1부는 인천교구 전사, 즉 교구설정 이전에 인천지역에 가톨릭 신앙이 전해진 이야기와 박해 시대 인천지역 순교자들의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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