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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20

20. 안중근 토마스 의사 가족과 빌렘 신부 그리고 청계동성당 <상> 빌렘 신부, 1896년 12월 안중근 의사 가족과 운명적 첫 만남  노르베르트 베버, ‘빌렘 신부’,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청계동,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프랑스인이지만 독일인으로 살아야 한 빌렘 니콜라 조제프 마리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helm, 한국명 홍석구, 1860~1938) 신부. 안중근(1879~1910) 토마스 의사를 기억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안 의사 순국 115주기를 기념해 3월 동안 2~3차례에 걸쳐 빌렘 신부와 안중근 가족 그리고 황해도 청계동성당에 관해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사진 아카이브를 소개한다. 빌렘 신부는 1860년 1월 24일 프랑스 모젤르(Moselle) 스피쉐.. 2025. 3. 5.
19.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일제 탄압으로 1942년 폐교… 한국인 사제 105명 배출  노르베르트 베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바라본 새남터’, 유리건판, 1911년 3월, 서울,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베버 총아빠스, 거룩한 순교 역사 현양 1911년 서울 용산에는 일본인 1만여 명이 거주했다. 대부분 군인이었고, 철도와 산업체 종사자들이 뒤를 이었다. 일제는 용산개발계획을 세워 이곳을 거점으로 조선의 산업 철도를 연결하려 했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용산에 끌린 것은 그 무엇도 아니고 바로 이 땅의 거룩한 순교 역사 때문이었다. 용산과 한강 사이 형장에서 수많은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위해 순교했다. 그 대표적 성지가 새남터·삼성산·당고개·절두산이다. 베버 총아빠스.. 2025. 3. 5.
18. 하우현성당 <하> 하우현성당 교우들, 순교자들의 후손이며 박해의 산증인  노르베르트 베버, ‘하우현성당 남교우들’, 유리건판, 1911년 3월, 경기도 하우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쓰라린 빈곤 속에서도 신앙은 바위처럼 굳건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박해를 이겨내고 가톨릭 신앙을 지켜온 하우현 신자들에게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은 아직 삶에서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무엇이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를 이 황량한 산중 고독 속으로 내몰았는지도 알 턱이 없다. 그들은 가난 속에서 자랐고, 그런 환경에 만족한다. 남자들은 풍상에 단련되었다. 대부분 부모가 서울을 빠져나와 이곳에 은거할 때 따라온 사람들이다. 당시 그들의 부모는 세상을 버리고 이 미지의 .. 2025. 2. 23.
17. 하우현성당 <상> 박해시대 교우촌 삶 그대로 간직한 하우현 신자들 모습에 감명  노르베르트 베버, ‘하우현성당 전경’, 유리건판, 1911년 3월, 경기도 하우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801년 신유박해 때 생긴 유서 깊은 교우촌 하우현성당은 서울과 경기도를 잇는 청계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 지역에서 처음으로 복음이 선포됐던 이곳은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교우들이 숨어 살며 신앙생활을 지켜오던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성 볼리외 신부와 복자 한덕운(토마스)·하느님의 종 서태순(아우구스티노)·이조이(요셉)·순교자 김준원(아니체도) 등이 이곳에서 생활했다.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1893년 하우현 교우촌에 공소가 설립됐고, 이듬해인 1894년 제2대 주임 조.. 2025. 2. 16.
16. 시장과 장터 장터, 생필품 사고파는 일상의 공간이자 삶의 잔치 펼치는 자리  배오개 시장, 1925년, 유리건판,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일본인 상점 이용하지 않고 재래시장 고수 시장은 단순히 가게만 죽 늘어서 있는 저잣거리가 아니다. 있는 자 없는 자 할 것 없이 모든 계층이 드나드는 대중의 열린 터이다. 또 민심을 알아보기 위해선 지금도 반드시 들러야 하는 소통 공간이다. 장사꾼들의 말처럼 시장에는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값나가는 귀금속부터 모든 생필품, 각종 먹거리가 즐비하다. 호객꾼들이 저잣거리를 오가며 손님의 소매를 잡고 끌다시피 자기 가게로 데려간다. 놋그릇 장수들은 양잿물을 가득 먹인 볏짚으로 유기를 윤이 나도록 닦고 있다. 옷감 장수들은 온몸에 치렁치렁.. 2025. 2. 9.
15. 떡메질 설 떡국, 복을 나누며 간절한 한 해 소망 담은 축제의 음식  나이를 더해주는 설 떡국은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던 우리 조상들의 간절한 한 해 소망을 담은 음식이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1911년 5월 황해도 신천군 청계리를 방문해 떡을 만들고 있는 가족을 촬영했다.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설날 아침 밥 대신 떡국 올리고 차례 지내 곧 ‘설’이다. 순우리말인 설은 한 해의 첫날, 곧 새해를 맞는 날을 뜻한다. 한자로 정초(正初)·원일(元日)·원단(元旦)·정조(正朝)·세수(歲首)·세초(歲初)·세시(歲時)·연두(年頭)·연시(年始) 등으로 표현된다. 설이란 말은 이미 삼국시대 때부터 쓰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한식·단오·추석과 함께 4대 명절로 .. 2025. 1. 26.
14. 할머니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삶과 신앙 굳건히 지켜온 ‘옆집의 성인들’  노르베르트 베버, ‘묵주를 든 처네 쓴 할머니’, 유리건판, 1911년 3월, 하우현성당,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신앙 전수자이자 지혜 전해주는 영적 스승 조부모, 특히 할머니는 집안에서 ‘신앙의 전수자’다. 아울러 가정에 지혜를 전해주는 ‘영적 스승’이시다. 구교우라면 항상 묵주기도를 하고 계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또 묵주기도뿐 아니라 아침저녁 기도와 삼종기도 등 모든 기도를 할머니에게서 배웠고, 늘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할머니를 추억할 것이다. 할머니의 간구로 집안에 성직자·수도자가 배출됐고, 신앙의 명맥이 이어졌다. 그래서 할머니는 가정 교회의 으뜸 교리교사다. 할머니.. 2025. 1. 19.
13. 국수 생일이나 잔칫날·제삿날 먹으며 기쁨과 슬픔 함께 나눈 국수  노르베르트 베버, ‘독상을 받은 신부의 손님들’, 1911년 5월 21일 황해도 신천군 청계리,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잔칫상과 제사상에 빠지지 않고 오른 국수 우리 민족은 예부터 국수를 잔칫날 함께 나눠 먹으면서 기쁨을 나눴고, 상가에서 음복하며 먼저 세상을 떠난 이를 추모하고 슬픔을 달랬다. 돌·생일·회갑 등 태어난 날과 혼례 등을 축하하는 잔칫상에, 또 제사상 제수로 빠지지 않고 올라오는 음식이 바로 국수였다. 국수는 고려 시대 송나라에서 들어왔다. 스님들이 송나라를 왕래하면서 국수를 들여와 절간 음식으로 먹었고, 이후 상류사회 잔치와 제사 음식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지금은 밀을 .. 2025. 1. 12.
12. 노인 신앙의 눈으로 가장 단순하면서도 기품있는 노인들 일상 포착  노르베르트 베버(?), ‘노인’, 유리건판, 연도 및 촬영지 미상,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신앙과 삶의 품격 온몸에 배어있는 노인들 예수회 신학자 칼 라너 신부는 참으로 인간다운 삶이란 자유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희망, 사랑으로 포착되는, 영원한 하느님의 무게를 지닌 삶이라고 정의했다. 곧 향주덕의 삶, 하느님을 향한 삶이 참으로 인간다운 삶인 것이다. 그러면서 라너 신부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찾아 얻게 하는 것은 실상 이념이나 고상한 말이나 자아 반영이 아니라, 이기심에서 나를 풀어주는 행위, 나를 잊게 해주는 남을 위한 염려, 나를 가라앉히고 슬기롭게 해주는 인내 등”이라고 했다... 2025. 1. 1.
11. 찰고(察考) 대부분 읽지도 쓰지도 못하지만 찰고 때 ‘요리문답’ 술술 암송  황해도 청계본당 팔상공소 신자들이 본당 주임인 빌렘 신부에게 찰고를 받고 있다. 노르베르트 베버, ‘찰고’, 1911년 5월 22일 팔상공소,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요리문답 제대로 외우지 못하면 불호령 1909년 성 베네딕도회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선교사들이 한국에 진출해 1911년 서울 백동수도원을 설립하기 전까지 조선대목구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교황 파견 선교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한국인 성직자도 있었다. 1911년 당시 한국에서 사목하던 한국인 신부는 불과 15명이었다. “독일인 새내기 선교사들은 신자 7만 1252명, 프랑스인 사제 41명, 한국인 사제 15.. 2024. 12. 29.
10. 성 베네딕도회 백동수도원 1909년 한국에 진출한 성 베네딕도회, 서울 백동에 수도원 건립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백동수도원 건립을 위한 정지 작업을 하고 있다. 유리건판, 1910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뮈텔 주교, 성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요청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는 한국에 처음으로 진출한 남자 수도회다.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한국 교회 안에서 교육을 담당할 수도회를 애타게 찾았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애국계몽운동으로 그리스도교계 사립학교가 많이 세워졌다. 이 시기 개신교 주도로 세워진 사립학교 수만 해도 전국에 5000여 개나 됐다. 개신교가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한 주된 이유는 선교였다. 선교사들은 치외법권을 내세워 일제의 간섭을 받.. 2024. 12. 15.
9. 여인의 일상 다듬이·절구·맷돌질하는 여인들… 사랑 깃든 일상의 숭고함 드러내  노르베르트 베버,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여인’,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해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해주에서 만난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여인’ 아궁이에 콩대나 싸리나무를 태우면 타닥타닥 소리가 난다. 우리 조상들은 이 소리가 마치 곡식 영그는 소리와 같다 해서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한 해 농사의 대풍을 기원하며 오곡밥을 짓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땠다. 또 정초부터 집집이 아궁이에서 나는 이 요란한 소리로 집안의 잡귀를 몰아냈다. 이를 ‘액막음’이라 불렀다. 이처럼 아궁이는 곡기가 드나드는 곳이어서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과 천지의 기운이 드나드는 주방과 함께 집을 짓고 관리할 .. 2024. 1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