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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18. 하우현성당 <하>

by 세포네 2025. 2. 23.

하우현성당 교우들, 순교자들의 후손이며 박해의 산증인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하우현성당 남교우들’, 유리건판, 1911년 3월, 경기도 하우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쓰라린 빈곤 속에서도 신앙은 바위처럼 굳건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박해를 이겨내고 가톨릭 신앙을 지켜온 하우현 신자들에게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은 아직 삶에서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무엇이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를 이 황량한 산중 고독 속으로 내몰았는지도 알 턱이 없다. 그들은 가난 속에서 자랐고, 그런 환경에 만족한다. 남자들은 풍상에 단련되었다. 대부분 부모가 서울을 빠져나와 이곳에 은거할 때 따라온 사람들이다. 당시 그들의 부모는 세상을 버리고 이 미지의 산골에 터전을 닦았다. (⋯) 그들의 부모는 일찍이 신앙을 위해 전 재산을 버렸다. 사랑하는 이들은 망나니의 칼에 피를 뿜었다. 쓰라린 빈곤 속에서도 신앙은 그들을 둘러싼 험준한 바위처럼 굳건했다. (⋯) 뜨거운 믿음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저 눈동자들! 이 산골짜기에서 신앙을 구했고 신앙은 그들의 전부였으니, 그들이 이 산골짜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그 눈빛 하나가 그 어떤 교회사 책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지금 다시 박해가 시작될지라도 이 그리스도인들은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증명하는 눈빛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191~193쪽)

베버 총아빠스는 순교자들의 후손이며 박해의 산증인들인 하우현 신자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 걸 잊지 않았다. 아직 남녀가 엄연히 구별되는 한국의 관습을 존중해 남교우들은 하우현성당을 배경으로, 여교우들은 사제관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사내아이들은 남자들과 어울리고, 여자아이들은 여인들 틈에 섞여 자연스레 무리를 이룬다. 하우현성당이 잘 나올 수 있도록 남교우들의 자리 배치에도 꼼꼼히 신경을 썼다.<사진 1> 하우현 신자들은 화전을 일구어 담배 농사를 주로 했다. 산간 지방에서 도시와 마을에 내다 팔기 좋기로는 담배가 으뜸이었다. 고단한 산골 삶 탓인지 신앙 교육은 주로 밥상머리에서 행해졌다.

“아침 식사 때는 재미있는 밥상머리 공부를 했다. 건장한 남자, 원기 왕성한 젊은이, 그리고 열두 서너 살 먹은 소년 등 꽤 많은 신자가 모였다. 그들은 매년 두 차례씩 사제가 시행하는 교리 시험을 치르고 싶어 했다. 대부분 읽지도 쓰지도 못하지만, 이 딱한 사람들이 교리서를 술술 암송하고, 아이들까지 교리를 훤히 꿰고 있는 것을 보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02쪽)

<사진 2>노르베르트 베버, ‘하우현성당 여교우들’, 유리건판, 1911년 3월, 경기도 하우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남녀 구별 한국 관습 존중해 따로 사진 촬영

베버 총아빠스가 하우현성당을 배경으로 촬영하는 동안 여교우들은 먼발치에서 성당 부지 평탄 작업 때 캐낸 돌로 만든 층계 위에 한데 모여 지켜보고 있었다. 흰옷과 색동저고리와 색동옷고름들이 환한 봄 햇살을 받아 마치 한 폭 그림 같았다.<사진 2> 여교우들은 베버 총아빠스 일행을 환영하는 뜻에서 미사보를 썼다. 아낙들과 소녀들은 토요일마다 시냇가로 가서 다음날 주일 미사 때 쓸 면포를 빨고 다듬이질을 한다고 했다. 줄지어 나란히 서 있는 여교우들의 소박한 모습에는 성직자들을 공경하는 마음새가 자연스레 풍긴다. 어른들은 물론 어린 소녀들까지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으고 예를 표한다. 베버 총아빠스는 이들을 보고 “평화로운 얼굴을 했으며 보석과도 같은 신앙의 열정이 뿜어져 나왔다”고 감동했다.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1911년 3월 26일 하우현성당에서 주일 미사를 봉헌한 후 이곳 교우들과 사제관 뜨락에서 점심을 함께했다.<사진 3> 바스크 모자를 쓴 르 각 주임 신부는 아주 여유롭지만,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교우들에게 둘러싸여 차담을 하는 것이 익숙지 않아 어색해하고 있다. 전교회장인 듯한 이가 커피를 따르고, 식탁에는 와인도 한 병 놓여있다. 이 광경을 베버 총아빠스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하우현성당 교우들과 베버 총아빠스 일행 친교의 자리’, 유리건판, 1911년 3월, 경기도 하우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사진 4> 노르베르트 베버, ‘하우현성당 전교회장 가족’, 유리건판, 1911년 3월, 경기도 하우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오늘 점심은 많은 사람이 함께 나누었다. 친교의 자리를 만들려고, 식후에는 사제관과 경당 사이의 뜨락에 커피를 마련했다. 검은 머리를 땋아 늘어뜨리고 얼굴이 밤색으로 그을은 아이들이 우리 주위에 모여들었다. 아이들의 어깨너머로, 남자들은 우리가 한국식 장죽을 피우고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리가 그들의 담배를 거절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우리 앞에서 담배 피우지 못하는 처지를 충분히 보상받는다고 어겼다. 갑자기 내 뒤에서 줄이 흐트러졌다. 준수한 용모의 젊은이 하나가 빙 둘러선 사람들 속으로 들어서자 다시 둥근 대형이 갖추어졌다. 그 젊은이 얼굴에 정신이 투명히 드러났다. 그는 우리의 방문에 대해서뿐 아니라,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 서울에서 추진하는 우리의 선교 사업에 대해서도 감사의 뜻을 표명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98쪽)

베버 총아빠스는 점심과 차담을 마친 후 전교회장 가족과 사진 촬영을 했다. 차담 자리에서 커피를 따르던 이다. 그는 최근 모친상을 치렀다고 한다.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사진에는 전교회장의 가족 3대가 담겨있다.<사진 4> 흑립을 쓴 이가 아버지이고 그 옆에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이가 전교회장이다. 아기를 안고 있는 이가 부인인 듯하고 슬하에 7남매를 뒀다.

<사진 5> 노르베르트 베버, ‘하우현성당 아이들’, 유리건판, 1911년 3월, 경기도 하우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순박한 하우현성당 아이들의 모습도 담아

베버 총아빠스는 순박한 아이들의 모습을 담는 것도 빠트리지 않았다. 아마도 아이들의 색동저고리에 반해 남교우들 사진을 촬영한 후 세 아이만 놀라 성당 계단에 앉혀놓고 찍은 듯하다.<사진 5> 산골 강한 햇살에 밤색으로 피부가 그을었지만, 아이들의 눈빛과 미소는 해맑다. 베버 총아빠스는 교우촌을 방문할 때마다 예의 바른 아이들 모습에 감탄하곤 했다. 부모와 조부모로부터 잘 받은 신앙 교육 덕분에 미사 때면 잡담은커녕 한눈도 팔지 않는다. 베버 총아빠스는 이런 아이들의 모습에서 구원의 갈망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깨달았다. 그러면서 그는 아이들을 통해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 민족의 미래를 걱정했다.

“순교자의 피가 스민 이 땅에서 신앙의 열매가 자라나 이토록 풍성한 수확을 거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느껴진다. 실로 한국은 시대의 전환점에 서 있다. 박해의 폭풍우도 지나갔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교는 뿌리를 굳건히 내렸다. 이제 희망의 봄날이 찾아올 것인가? 하룻밤 사이에 식민지 한국은 일본의 이주지가 되고 말았다. (⋯) 한국인들은 잃어버린 땅을 포기했다. 그들은 일본인과 함께 살 수도 없고 함께 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 그들은 변화된 환경과 새로운 경제 사정과 낯선 풍습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새로운 상황에 적응시키는 길은 어려운 환경에서 탈피하도록 돕는 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75~176쪽)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3박 4일의 방문을 마치고 1911년 3월 28일 하우현 교우촌을 떠났다. 베버 총아빠스는 “오늘 이 고즈넉한 산골짜기와 착한 주민들과 헤어지려니 그만큼 더 힘들다”며 석별을 아쉬워했다. 하우현 골짜기에서 하산하는 길에 교우 몇이 동행했고, 아이들도 선교사들의 외투를 들고 언덕배기까지 따라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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