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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가톨릭 소식들

[성모승천대축일 특집] '한국의 성모'와 40년 함께 산 방오석 화백

by 세포네 2006.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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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가 성모님 뜻대로 살길 바라죠"

 

▲성모께서 아기 예수를 봉헌하심 64x124㎝, 화선지 묵채

▲하늘에 오르시는 어머니 54x79㎝, 화선지 묵채

▲한국의 성모자 58x54㎝, 화선지 묵채

▲방오석 화백 작품에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한없이 인내하고 희생하는 한국 어머니의 사랑이 담겨 있다. 수도자처럼 기도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리는 그는 "성모님 사랑이 있는데 부와 명예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웃는다.

 
 

 "자식이 엄마 좋아하는 데 무슨 이유가 있겠어요?"

 40년 넘게 한국의 성모 마리아를 그리는 방오석(마르가리타, 68) 화백에게 질리지 않는 비결을 물었더니 물어보나마나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기야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본능적 감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방 화백의 40년 화업은 한국의 어머니 얼굴을 찾는 작업이었다. 그는 갸름한 서구 미인형의 성모 마리아에 익숙한 우리에게 한복 차림에 쪽을 찐 복스런 얼굴의 어머니를 찾아줬다.

 그가 5년 전 서울 명동 평화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다.

 한 중년 부인이 그림을 감상하다말고 구석에 가서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방 화백이 깜짝 놀라서 다가가 물었더니 부인은 "우리 어머님이 왜 이제야 오셨는지 모르겠다"며 감동의 눈물을 훔쳤다.

 이번에는 미국인들이 한국의 성모를 보고 감탄하고 있다. 지난 5월부터 넉달 일정으로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튼대학(마리아수도회 설립) 갤러리에서 그의 작품전이 열리고 있는데 관람객들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성모를 보고 탄성을 지른다. 매년 한차례 세계 각 국의 성모 마리아 미술작품을 기획전시하는 데이튼대학 갤러리가 아시아 작가를 초대한 것은 방 화백이 처음이다.

 방 화백은 "성모님이 서양에 한국 이미지를 알리는 데 도움을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라며 작가로서의 영광을 성모 마리아에게 돌렸다.

 그는 "한 평생 성모님 치맛자락 붙잡고 살아온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는 유서깊은 교우촌인 강원도 풍수원 출신이다. 증조부모는 구한말 박해때 옥에서 아사(餓死)한 순교자다. 지금도 풍수원 노인들이 '방 회장'으로 기억하는 조부 방순서는 문전옥답을 팔고, 아버지 방재선은 막노동으로 풍수원성당을 지었다.

 10남매의 막내인 그는 8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신부가 된 오빠(방영석)마저 뒤이어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소녀시절에 눈물이 많았다. 특히 어머니 품이 그리울 때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다가 성당 뒷산에 있는 어머니 묘소에 가서 우두커니 앉아있다오곤 했다.

 어느 날 꿈을 꿨다. 흰옷을 입은 여인네들이 성모 마리아 뒤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데 그 가운데 어머니가 있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성모를 따라가는 어머니를 울며불며 부르다 잠에서 깼다.

 "어머님이 정 떼려고 꿈에 나타나셨나봐요. 그때부터 슬퍼하지 않고 성모님을 어머니처럼 모시고 살았어요. 어머님은 제 작업실이건 성당이건 어딜가나 곁에 계세요."

 그는 19살에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 입회했다. 그의 예술적 재능을 발견한 원장수녀는 "한국의 미와 정서가 담긴 성화, 특히 인물화를 그려보라"며 붓을 들려줬다. 동덕여대와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공부하며 한국화가 청전 이상범, 서예가 철농 이기우 선생 등에게 사사(師事)받았다. 수녀원 화실을 기도실 삼아 그림을 그렸다. 붓을 들고 있는 시간이 기도시간이었다.

 하지만 1981년 수녀원을 나와 홀로서기를 해야 했다. 25년 동안 입고 있던 수도복을 벗자 '수녀님'에서 '아줌마'로 호칭만 바뀐 게 아니다. 수녀원에 있을 때보다 기도를 더 많이 하지 않고서는 낯선 세상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그런 시련 속에서 제단벽화 103위 성인 부조(24mx5m)를 완성해 새남터 순교성지 성당에 봉헌했다. 한옥 형태 새남터성당에 있는 성모자상, 순교성인화, 김대건 신부 영정 등 미술 작품 대부분이 그의 작품이다.

 "성모님이 지금껏 이끌어 주셨어요. 수녀원에 들어갈 때, 수도복을 입고 배움의 길을 찾을 때, 그리고 홀로서기를 할 때 항상 성모송을 4000번씩 바치면서 성모님께 길을 물었어요. 성모님은 우리 손을 잡고 주님께 데려다주시는 만인의 어버이십니다."

 그의 작품은 국내외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외국으로도 알게 모르게 상당수 흘러나갔다. 하지만 그는 화가로서 명성을 쌓는 데 무관심하다. 언젠가 김수환 추기경이 유럽에서 '한국의 방오석' 작품을 격찬하는 얘기를 듣고 돌아와 "방오석이 누구냐?"고 주위에 물어봤을 정도다.

 방 화백은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고 성모님 사랑을 느끼고, 더 나아가 성모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말한다. 그 때문에 시간과 재물과 건강을 모두 작품에 쏟는다고 한다.

 "성모님이야말로 하느님 뜻대로 사신 분입니다. 겸손하고 충직하게 하느님 구원계획에 따랐기 때문에 하느님 영광에 불림을 받은 것이지요. 우리도 성모님 뜻대로만 살면 하느님이 다 알아서 이끌어 주실 거예요."

 어릴 때부터 동정녀의 삶을 동경했다는 그는 아파트 작업실과 성당만을 오가며 홀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물론 집에 어머니가 계신다. 그래서 외출할 때는 성수를 찍어 성호를 긋고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돌아와서는 "어머니 잘 다녀왔습니다"라고 꼬박꼬박 인사한다.

  김원철 기자  평화신문 기자   pb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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