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담 공소 아이들. 대부분 교육을 받지 못하고 평생 문맹으로 살아간다.
▶곽석희 신부가 코끼리를 타고 공소 방문에 나서고 있다. 공소들은 대부분 산악 지역에 위치해 있어 차로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산 넘고 물 건너 다니며 공소 방문
대부분 오지 생활·문맹
아이들 도시서 공부시키려
곽신부, 기숙사 건립 추진
캄보디아=우광호 기자
엉덩이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들썩거렸다. 결국에는 머리가 차 천정에 ‘쿵쿵’ 부딪힌다. 비포장 길. 몸이 힘들어 했다. 벌써 5시간째. 앞으로 머리에 혹이 얼마나 더 생겨야 하나.
“천국가는 길입니다.” 운전하던 곽석희 신부(한국외방선교회)가 인상 잔뜩 찌푸린 기자에게 미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편안하고 안락한 길은 지옥 가는 길입니다. 천사들이 살고 있는 천국으로 안내해 줄테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그리고는 끔찍한 말을 했다. 앞으로 4시간을 더 가야 한단다. 차가 또다시 심하게 요동쳤다. “악” “악”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곽신부가 다시 한번 웃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좋은 곳에 가려면 그만큼 보속을 해야지요.” 곽신부는 3개월 전에 헤어진 산악지역 신자들의 얼굴이 눈에 밟힌다고 했다.
몬둘끼리(Mondul Kiri) 주(州) 부스라(Busra) 공소와 도담(Dodam) 공소를 방문하는 길. 곽신부가 묵주를 꺼내 기도했다. 캄보디아에서 생활한지 벌써 5년째다. 2년 전 캄보디아 컴퐁참 교구 수웡(Suong)본당 주임으로 부임했다. 말이 본당 주임이지, 일 년의 대부분을 ‘길’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할 지역이 경상남북도를 합친 만큼 넓은데다, 공소가 대부분 산간 오지에 위치해 있어 한번 방문할 때면 아예 일주일씩 성당을 비워야 한다. 성당도 처음에는 쓰려져 가는 폐허였다. 지난 2년 동안 화장실 만들고, 울타리 치고, 수로 파고, 꽃 심고, 텃밭을 가꾸는 등,‘뚝딱뚝딱’한 끝에 그나마 성당 꼴을 갖췄다. 지난 1월에 는 전기도 들였다.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곽신부는 “불편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과 가깝게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남은 2시간. 최악의 코스다. 산악 모험 영화를 찍나 싶었다. 폭포를 지나고, 계곡을 오르고, 가파른 언덕을 넘고 나서야 간신히(?) 부스라(Busra) 공소를 만날 수 있었다.
나무와 풀로 대충 엮은 집집마다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신자 150여명이 살고 있단다. 신자들이 환한 웃음으로 곽신부를 반겼다. 고구마, 감자, 보리 농사로 어렵게 생계를 잇는 사람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물론 전화도 없다. 주민 대부분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아이들도 학교에 가지 않는다. 가난이 대물림 되고 있었다. 여자 아이는 15살 혹은 16살이 되면 400~500달러를 받고 시집을 간다. 말이 결혼이지 가난한 부모 형제를 위해 팔려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교육이 가장 절실합니다. 이 곳에는 학교가 없으니까 도시 지역으로 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기숙사를 만들어야 합니다. 절실합니다. 적어도 글은 읽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들을 생각하면 밤에도 잠이 잘 오지 않습니다.”
곽신부는 한국교회 신자들이 기숙사를 만들어 준다면 그것은 바로 100년 후 캄보디아 교회를 위한 가장 소중한 선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야 수억원이 필요하지만 캄보디아에서는 몇 천만원이면 지을 수 있다고 했다.
신자들이 간단한 간식거리를 내왔다. 자신들 먹을거리는 양철 그릇에, 신부님 먹을거리는 도자기 접시에 담았다.
곽신부가 도담(Dodam) 공소로 가겠다고 했다. 이제부터는 차는 무용지물. 산과 늪지대를 헤쳐 나아가야 하는 험한 길을 가야 한다. “걸어서 가야 하느냐”는 질문에 곽신부가 웃었다. 그 때 신자들이 코끼리 한 마리를 끌고 왔다. 그리고 타란다. 밤이 되기 전에 도담 공소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앞으로 코끼리 걸음으로 3시간 더 이동해야 한다.
곽신부가 능숙한 솜씨로 코끼리 등에 올라탔다. 코끼리가 한 발씩 움직일 때 마다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코끼리가 멈춰섰다. 소떼 한 무리가 길을 가로질러 건너고 있었다. 맨 앞에는 어린 양 한 마리가 소떼를 이끌고 있었다.
“어린 양이 소를 몰고 가네요.” 곽신부가 코끼리 위에서 웃었다. 코끼리를 다루는 캄보디아 신자도 함께 웃었다.
▨ 도움주실 분 : 한국외방선교회 02-3673-2525, 우리은행 1002-429-982489 예금주 정두영 신부
“시집안간 처녀들이 모여 산다고 이상하게 보는 편견 힘들었지요”
■첫 캄보디아인 수녀회
1994년 3월. 28살의 캄보디아 처녀 앙 썽와트(Ang saugwate)와 수운 분 타림(Sun bun Tharim)은 낯선 환경에 잔뜩 주눅 들어 있었다. ‘어떤 곳인지 한번 가보기나 하자’며 아무 생각 없이 방문한 성당. 태어날 때부터 불교문화에 ‘푹’ 젖어 있던 이들로서는 성당에서 드리는 미사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우연한 방문으로 두 처녀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2004년 3월. 10년 전 성당에서 우물쭈물하던 그 처녀들이 첫 서원을 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앙드레 로스웨프 신부가 1999년 설립한 캄보디아 교회 최초 자국인 수녀회 ‘십자가의 애덕 수녀회’ 창립 단원으로 입회한지 5년만이었다.
“처음 성당에 갔을 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처음에는 한동안 망설였지만 지금은 수도자의 길이 제 성소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두 처녀는 곧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제대로 된 수도원 건물도 없었다. 먹을 것 입을 것도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주위의 따가운 시선. 캄보디아에서는 아직 ‘수녀’가 낯선 존재.
“처녀들이 시집도 가지 않고 한데 모여 사는 것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 봤습니다. 편견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수녀들은 어린이 놀이방에서 글을 가르치고, 시골에서 온 여자 아이들을 위한 기숙사를 운영했다. 예비신자 교리도 지도했고, 주민 위생교육, 에이즈 환자 간호에도 팔 걷고 나섰다. 유일한 이동수단인 오토바이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종횡무진 소외된 계층 사이를 누볐다.
그런 수녀들을 보고 수도회 생활에 관심을 갖는 처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년 3월 첫 서원을 앞두고 있는 스레이 소치엇(Srey Socheat) 수련자가 말했다. “나는 작은 사람입니다. 큰 계획은 없습니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수녀님들이 나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살겠습니다. 예수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를 갚기 위해 제 작은 삶을 바치겠습니다.” 옆에 있던 앙 썽와트 수녀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꿈을 가지고 있어요.” 어떤 꿈일까. 질문을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눈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 꿈은 ‘캄보디아의 복음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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