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보카토(1.9)◀ (부제)
▶비탈리코(1.9)◀ (주교)
▶포르투나토(1.9)◀ (부제)
신분 : 순교자
연대 : 연대미상
성 비탈리쿠스(Vitalicus) 주교와 그의 부제인 성 레보카투스(또는 레보카토)와 성 포르투나투스(Fortunatus)는 스미르나(Smyrna, 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 Izmir)에서 순교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성 비탈리쿠스는 비탈리스(Vitalis)로도 불린다.
▶마르첼리노(1.9)◀
신분 : 주교
연대 : 566년
지역 : 안코나
이탈리아의 안코나에서 태어난 성 마르첼리누스(또는 마르첼리노)는 550년경에 안코나의 주교가 되었다.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9월 3일)가 그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마르치아나(1.9)◀
신분 : 동정 순교자
연대 : 303년
성녀 마르키아나(또는 마르치아나)는 아프리카 북서부 대서양 연안 모리타니아(Mauritania)의 루수쿠르 태생으로서 천상 은혜를 보존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세속을 끊어버렸다. 그러나 때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으므로, 용감하게 신앙을 지키던 그녀 역시 이방인들의 우상숭배를 강요받았다. 이를 거절하면서부터 그녀는 무수히 얻어맞았으며, 군인들이 순결을 빼앗으려고 덤벼들 때 기적적인 힘으로 동정을 지킬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주민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심을 보여 수많은 이들이 개종하였다고 전해온다.
▶마르치오닐라(1.9)◀
▶바실리사(1.9)◀ (동정)
▶아나스타시오(1.9)◀
▶안토니오(1.9)◀ (신부)
▶율리아노(1.9)◀
▶첼소(1.9)◀ (소년)
신분 : 순교자
연대 : 304년경
고대의 순교록에 의하면 성 율리아누스(Julianus)와 성녀 바실리사(Basilissa)는 비록 결혼하여 부부생활을
하였으나 서로 동의하에 합의하여 평생 동안 정결을 지켰다고 한다. 그들은 엄격한 생활로써 자신들을 성화시켰으며, 그들의 수입을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위하여 늘 사용하여 항상 가난하게 살았다. 이런 목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집을 개조하여 일종의 병원으로 만들었는데, 어떤 때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용하여 늘 성시를 이루었다. 바실리사는 여성들을, 율리아누스는 남성들을 지도하였다. 이런 소문이 점차 퍼져나가자 박해의 손길이
이들에게 미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부부가 영광스럽게도 순교의 월계관을 받게 되었다.
이 부부가 순교할
때 성 안토니우스(Antonius) 신부, 성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 수련 수사, 소년 성 켈수스(Celsus)와 그의 어머니 성녀
마르키오닐라(또는 마르치오닐라) 그리고 성녀의 형제 몇 명이 함께 순교하였다. 성 율리아누스와 성녀 바실리사의 존재에 대해 일부 성인전 작가들은
의문을 갖기도 한다.
▶바닝고(1.9)◀
신분 : 수사
연대 : 683년경
지역 : 페강
성 바닝구스(또는 바닝고)는 클로테르 3세로부터 네우스트리아(Neustria)의 지방 장관으로 임명된 사람으로 에스파냐 바르셀로나(Barcelona)의 성녀 에우랄리아(Eulalia, 2월 12일)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꿈속에서 이 동정 순교자가 나타나서 다음과 같은 복음 말씀을 들려주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마태 19,24). 이 말씀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는 진심으로 하느님께 회두했고, 성 반드레지실루스(Wandregisilus, 7월 22일)를 도와 퐁트넬(Fontenelle) 대수도원을 세웠으며 큰 수도자가 되었다. 그가 페캉 계곡에 세운 수녀원에서는 360여명의 수녀들이 살았다고 한다.
▶베드로(1.9)◀
신분 : 주교
연대 : 340-391년
지역 : 세바스테
성 바실리우스(Basilius, 5월 30일)와 성녀 엠멜리아(Emmelia, 5월 30일)의 아들이며, 성 바실리우스(1월 2일), 니사(Nyssa)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3월 9일) 그리고 성녀 마크리나(Macrina, 7월 19일)와 형제지간인 성 베드로(Petrus)는 10남매의 막내였다. 베드로는 어릴 때 부친과 사별하였으므로 누이인 마크리나의 도움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그의 부모들이 세운 이리스 강변의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362년에는 원장이 되었다. 그는 폰투스(Pontus)와 카파도키아(Cappadocia)를 강타한 기근에 적극 대처하였고, 380년에는 세바스테의 주교가 되었으며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Council of Constantinople)에 참석했던 교부이다.
▶베르트발드(1.9)◀
신분 : 수사, 대주교
연대 : 731년
지역 : 켄터베리
브리트발드(Brithwald) 혹은 베륵투알드(Berctuald)라고도 불리우는 성 베르트발드는 원래 켄트(Kent) 지방의 러클버(Reculver)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다가 692년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로마(Rome)로 가서 팔리움(Pallium)을 받은 듯하다. 그는 매우 정열적인 주교로서 37년 동안이나 사목했으며, 성 알델무스(Aldhelmus, 5월 25일)와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6월 5일)와는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비탈리스(1.9)◀
▶세쿤도(1.9)◀
▶에픽테토(1.9)◀ (주교)
▶유쿤도(1.9)◀
▶펠릭스(1.9)◀
신분 : 순교자
연대 : 250년
지역 : 아프리카
성 에픽테투스(Epictetus)와 성 유쿤두스(Jucundus), 성 세쿤두스(Secundus), 성 비탈리스, 성 펠릭스(Felix)와 다른 7명의 동료들은 아마도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한 열두 명의 아프리카 출신 순교자들로 보인다.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는 성 에픽테투스를 주교로 기록하였다.
▶파스카시아(1.9)◀
신분 : 동정 순교자
연대 : 178년경
지역 : 디종
성녀 파스카시아는 프랑스 디종에서 순교하였고 그곳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의 저서에 언급된 것에 의하면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후에 성녀에 대한 전설은 디종의 성 베니뇨(Benignus, 11월 1일)와 연관되었다.
▶필란(1.9)◀
신분 : 수도원장
연대 : 8 세기경
성 필란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특별한 공경을 받는 성인으로 요람에서부터 열심한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 장성한 후 그는 성 안드레아(Andreas) 수도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은수자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덕행이 알려지면서부터 원장으로 뽑혔다. 그는 이 직책을 스스로 사임하고 다른 동료 몇 명과 함께 스코틀랜드 퍼스셔(Perthshire)의 글렌도챠트(Glendochart)로 은신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성당을 지었는데, 하느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기적이 수없이 일어나서 연일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그는 스트래트필란(Strathfillan)에 안장되어 있다. 성 필란은 포일란(Foelan)으로도 불린다.
▶하드리아노(1.9)◀
신분 : 수도원장
연대 : 710년
지역 : 켄터베리
아프리카 태생인 성 하드리아누스(Hadrianus, 또는 하드리아노)는 이탈리아의 나폴리(Napoli)
근처 네리다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으며 캔터베리 대주교 임명을 거절하였다. 대신에 그는 그리스 수도자인 테오도루스(Theodorus)를 적당한
후보자로 추천했고 교황 비탈리아누스(Vitalianus)가 이를 승인하였다. 이 후 성 테오도루스는 하드리아누스를 캔터베리의 성
베드로(Petrus)와 바오로(Paulus) 수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39년 동안 수도원 장상직을
수행하면서 그는 수도원 쇄신에 정력을 기울였다. 성서에 해박한 지식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관리자였으며, 그리스와 라틴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서 캔터베리 수도원 학교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수도원이 배움의 전당으로서 자리를 굳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영국
교회는 위의 두 성인이 살아있을 때 최대의 번영을 누렸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는 710년 1월 9일 캔터베리에서 사망하여 수도원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무덤은 곧 기적을 낳는 곳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호노리오(1.9)◀
신분 : 순교자
연대 : 1250년
지역 : 뷔장케
프랑스 중부 베리(Berry)의 뷔장케에서 태어난 성 호노리우스(또는 호노리오)는 부유한 가축 상인으로서 특별히 금욕적인 생활을 하거나 성덕을 베푼 일도 없었다. 그는 평범하게 즐기며 살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가 어떤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자신의 하인들이 그의 재산을 강탈한 것을 알고 그들의 죄를 꾸짖었다. 그 결과 그는 탐욕스런 하인들에 의해 푸아투(Poitou)의 파르트네(Parthenay)에서 살해되었다. 그의 생애 자체는 전혀 성인다운 모습이 없었으나 그가 죽은 이후 그의 묘에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죄인들을 꾸짖다 숨진 그를 순교자로서 공경하는 신심이 번져갔다. 결국 그는 사후 200여년이 지난 1444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Eugenius IV)에 의해 시성되었다.
(가톨릭 굿뉴스 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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