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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가보고싶은 성당

[대전교구] 충남 합덕성당

by 세포네 2005. 8. 3.

 1. 지난 8월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본당 신자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본당 역사상 전신자 사진은 거의 처음으로, 본당 달력에 사용할 계획이다.
2. 성당 내부. 대전교구 첫 고딕식 성당인 공세리성당과 비슷하다.
3.  성당 뒷뜰에 있는 성직자 묘지.

 

내포지역 신앙.성소 못자리 115년 역사 자랑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푸근해지고, 향수에 젖어들어요."
 누구나 고향 이름을 들으면 그리움이 앞서지만 대전교구 합덕본당 출신들이 '합덕'이라는 이름에서 느끼는 향수는 남다르다. 내포지역 신앙 못자리이자 성소 못자리라는 '믿음의 고향'에서 자란 때문이리라.
 대전교구 모(母)본당인 합덕본당은 1890년 설립됐다. 양촌성당으로 출발했으나 9년 뒤 현 위치(충남 합덕읍 합덕리 275)로 옮기면서 합덕성당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61년 합덕읍 운산리에 신합덕성당이 생기자 구합덕성당으로 불리다가 97년 그 이름을 되찾았다.
 합덕성당은 넓은 내포평야가 사방으로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우뚝 서있다. 성당 넓은 터를 감싸고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팽나무 등이 성당 역사를 말없이 대변해주고 있다. 발 아래 수북이 쌓인 낙엽, 사제관 앞마당에서 한가롭게 노는 토종닭들은 포근한 초겨울 정겨운 농촌 풍경을 그대로 담아낸다.
 합덕본당은 대전교구에서 제일 먼저 설립됐으나 성당은 공세리성당에 이어 두번째(1929년)로 완공됐다. 충청남도 문화재 제145호다. 서양식 고딕 건물로 종탑이 두개인 것이 공세리성당과 다르지만 성당 내부는 비슷한 점이 많다. 공세리성당을 설계하고 지은 드비즈(한국이름 성일론) 신부가 합덕성당도 설계했다.
 "합덕성당 2대 복사를 지낸 최영세 요한 어르신이 합덕성당 설계 도면을 그리던 성 신부 옆에서 도와줬다고 증언했습니다."
 대전교구 성지위원회 위원으로 내포지역 교회사를 연구하고 있는 김윤배(방그라시오, 65)씨 말이다.
 공세리성당보다 규모가 조금 큰 합덕성당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에 벽을 바라보고 미사를 집전하던 제대와 벽에 걸린 십자가의 길 14처가 옛 성당 모습을 보여준다. 14처 성화를 담은 나무틀마다 각 처를 한자로 새겨 표시했으며, 벚꽃 모양으로 장식도 했다.
 성당 앞쪽 왼쪽 벽엔 본당 주보인 오래된 '성가정' 성화가 걸려 있고 오른쪽엔 성모상이 있다. 성모상 뒷벽을 이곳에서 손쉽게 구한 단풍가지들로 소박하게 장식한 것이 또 한번 고향 정취를 느끼게 한다.
 "성당 정면 십자가 양쪽 창문은 얼마 전에 신ㆍ구약의 만남을 상징하는 유리화로 다시 했습니다. 영성체 난간틀도 다시 복원할 계획이고요."
 본당 주임 김홍식 신부는 성전을 성전답게 복원하는 일이 중요하다며 서두르지 않고 하나씩 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합덕성당은 제7대 페랭(1921~1950년 재임, 한국이름 백문필) 신부 재임 때 건립했다. 200평 규모 붉은 벽돌 건물로 당시 돈 1만원이 넘는 공사비가 들어갔다. 이 돈은 쌀이 귀하던 당시 쌀 1800가마에 해당한다. 성당을 짓고자 중국 기술자들을 불러왔으며, 신자들은 멀리서 점심을 싸가지고 와서 노력봉사를 아끼지 않았다. 성당 완공식 때는 인근 마을 비신자들까지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
 합덕본당에 30년간 재임한 페랭 신부는 100년이 넘는 본당 역사에서 신자들 기억 속에 가장 깊이 남아 있는 사제다.
 "이 근방에서 백 신부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 고약과 안약을 만들어 신자, 비신자 가릴 것 없이 종기나고 눈병 난 사람을 치료해 주곤 하셨지. 상처가 나은 사람들은 감사 표시로 달걀을 가져왔고…. 그런데 6ㆍ25 때 끌려가셨어."
 김기산(루도비코, 75) 할아버지는 백 신부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고 전하면서 예전엔 청년 성가대와 악단까지 있을만큼 활발했고 아이들도 성당에서 놀며 자랐는데 지금은 성당이 너무 쓸쓸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백 신부의 자부적(慈父的) 사랑의 한 단면은 "내 양들을 위해 내 생명을 버리노라"는 그의 유언에서 드러난다. 6ㆍ25때 남은 신자 한명을 위해서라도 본당 사제는 성당을 지켜야 한다며 백 신부는 보좌인 박노열 신부를 남하시키고 홀로 성당에 남아 있다가 성모승천대축일 전날 고해성사 중 인민군에게 끌려가 순교했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성서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 사제였다.
 성당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바로 백신부 순교기념비가 있다. 백 신부의 사랑과 그 공덕을 높이 받들고자 1957년 신자들이 세운 것이다. 성당 뒤뜰 성직자 묘지에는 백 신부와 성 김대건 신부 스승인 매스트르 신부, 홍요한 신부, 심 마르꼬 신부 4명 사제의 묘가 있는데, 유해는 지난해 대전가톨릭대 성직자묘지로 이장됐다. 하지만 정신과 마음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다.
 합덕본당은 이미 1906년 이 지역 첫 사립학교인 매괴학교를 설립해 지역 교육사업에 헌신했으며, 1908년부터는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거두어 각 교우 가정에 양육비를 주어 기르도록 하는 사회복지사업도 폈다. 1947년 고아원을 설립(21년간 운영)하기 전까지 이 사업이 계속돼 300명의 아이들이 따뜻한 가정에서 클 수 있었다.
 또한 성당이 갖고 있는 토지가 수십만평에 달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작을 주면서 자연스럽게 전교에도 한몫 했다. 해방 후, 6ㆍ25 후 토지개혁과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거치며 지금 남아 있는 성당 부지는 6900평에 불과하다.
 합덕본당은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교우촌이 있었으며, 인근에 솔뫼성지와 신리성지, 이존창생가터가 있는 지역적, 역사적 여건 때문인지 특히 성소 못자리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사제 33명을 배출했으며, 수도자까지 합하면 100명이 넘는다. 번성했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침체된 농촌 성당이지만 성소의 맥은 이어가 신학생 2명을 두고 있다.
 합덕성당은 지금도 학생들의 성지 도보순례 코스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을만큼 뿌리깊은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김 신부는 "합덕도 한때는 풍수원ㆍ감곡처럼 성체현양대회를 계속했었다"면서 이 행사를 부활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역사에 걸맞는 여러가지 계획들을 하나씩 차분히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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