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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가보고싶은 성당

[서울대교구] 혜화동성당 (상)

by 세포네 2005. 6. 22.

◀ 1. 지금의 성전이 건립되기 전 초창기 혜화동성당 모습. 혜화동 언덕에 있던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1927년 함경남도 덕원으로 이전함에 따라 남게 된 수도원 목공소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2.1960년에 완공된 혜화동성당은 반백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오늘날 성당과 비교해봐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근대미를 자랑하는 한국교회 기념비적 건축물이다. 정면 현관 위에 있는 '최후의 심판도'부조는 김세중(1928∼86년)씨 작품이다.

  3. 혜화동성당 내부 전경.

 


성전에 있는 미술품 대부분이 대가들의 고뇌와 땀이 녹아있는 작품이어서 혜화동성당은 명실공히 가톨릭 미술의 보고(寶庫)라고 불린다.

  젊음과 낭만이 넘실대는 문화의 거리, 서울 동숭동 대학로.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저녁만 되면 발디딜 틈 없는 인파로 북적대는 곳이다. 하지만 혜화동 로타리 쪽으로 올라가면서 이런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진다. 웬만한 신자라면 교육 때문에 한두번은 꼭 가봤을 동성고 정문을 지날 때쯤 대학로의 번잡스러움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로타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게 되면 대학로와는 전혀 다른 고즈늑한 분위기와 만나게 된다. 로타리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푸르른 숲 속에 파묻혀 있는 신학교를 등에 지고 동성고와 맞닿아 있는 혜화동성당(주임 김철호 신부)이 한눈에 들어온다. 중림동성당(1892년)과 명동성당(1898년)에 이어 서울에서 세번째(1927년)로 설립된 혜화동성당. 명실공히 '믿음의 고향'이요, 한국교회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성당'이다.

먼저 혜화동성당이 이곳에 자리잡게 된 역사적 배경부터 살펴보자. 서울 한복판 교통의 요지인 혜화동 언덕에 나란히 붙어있는 신학교와 혜화동성당 그리고 동성고등학교가 가장 감사해야 할 이는 독일 성베네딕도회 회원들이다. 조선대교구장 뮈텔 주교가 한국교회 교육사업을 맡아줄 것을 요청함에 따라 한국에 진출한 독일 '성 오틸리엔의 베네딕도 수도회' 회원들이 낙산 아래 백동(柏洞, 혜화동의 옛 지명)의 전망 좋은 땅 3만평을 구입해 수도원을 세운 것이 1909년. 새로 설정된 원산대목구를 맡게된 베네딕도회가 1927년 수도원을 덕원으로 옮김으로써 경성교구가 백동 수도원 땅을 매입하게 됐고, 이 수도원 터에 지금의 신학교와 혜화동성당, 동성고가 들어선 것이다.

당시 수도원 땅은 백동은 물론 지금의 대학로 자리인 동숭동 일대까지 뻗쳐 있었는데, 동숭동 터는 일반에 매각했다고 한다. 이 일대가 지금처럼 발전하리라고는 당시에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벽안 선교사들의 땅을 보는 혜안이 놀라울 따름이다. 더불어 대학로 땅을 그 때 교구가 다 매입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나마 전부를 일반에 넘어가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1927년 4월29일 설립된 혜화동본당은 수도원 목공소를 개조한 성당으로 출발했다. 초대 주임은 시잘레(파리외방전교회) 신부. 목공소 건물에 종각을 세워 만든 40평 규모 성당은 1950년대에 이르러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건물이 낡기도 낡았지만 신자 수가 급격히 늘어나 3000여명에 이르는 교우를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비좁아진 것이다. 이에 7대 주임 정원진 신부는 1954년 '신축 성당 건립 기성회'를 조직함과 동시에 장면(요한, 제2공화국 국무총리 지냄) 박사를 회장으로 임명하고 성전 신축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교우들의 헌신적 노력에 힘입어 혜화동본당은 1960년 5월25일 교구장 노기남 대주교 주례로 역사적인 성전 봉헌식을 갖는다.

혜화동성당은 한국교회건축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기념비적 성당으로 평가된다. 교회건축 전문가 김정신(스테파노, 단국대) 교수는 '한국 가톨릭 성당 건축사'에서 "건축 전문가에 의해 설계된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건물인 혜화동성당은 1960년대 이후 보이기 시작한 근대 지향 성당 건축의 선구자적 건물로, 종탑의 형태나 창의 모양 등 모든 의장적인 면이 탈양식적이며 근대 건축 정신을 지니고 있다"고 건축사적 의의를 밝혔다.

그래서일까. 혜화동성당이 지난 1960년에 세워진 건물이라고 말하면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반백년 가까이 흐른 오늘날 성당과 비교해봐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근대적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당 건물 뿐만이 아니다. 혜화동성당은 가톨릭 미술의 보고(寶庫)나 마찬가지다. 어느 것 하나 가톨릭미술 대가들의 작품 아닌 것이 없다. 정웅모(서울대교구 성미술 감독) 신부는 '교회미술 이야기'에서 "이 성당 건립에 내로라하는 가톨릭 예술가들의 정성이 하나로 집결되었기 때문에 이 성당을 건축하면서 한국교회 미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성당 건립은 장발(루도비코, 1901∼2001년, 장면 박사 동생) 당시 서울대미대 학장의 지휘로 이뤄졌다. 설계를 맡은 이는 이희태(요한, 1925∼81년)씨. 이후 절두산순교기념관도 설계하게 되는 이씨는 당시 대다수 건축가들이 모더니즘과 국제주의 건축을 수용하고 소화하기에 급급한 상황에서 기존 성당 개념을 거부하고 자신의 개성을 살려나간 독창적 건축가였다.

성당을 바라볼 때 정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현관 위에 있는 '최후의 심판도' 화강석 부조다. 1961년 김세중(프란치스코, 1928∼86년) 서울대 교수가 원도를 작성하고 장기은 교수와 함께 조각한 이 부조에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라"(요한 14,6), "천지는 변하려니와 내 말은 변치 아니하리라"(루가 21,33)는 성서 구절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4명의 복음사가가 좌우에 자리잡고 있는 모습으로 제작됐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손가락 세 개를 펴고 있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의미하며, 품에 안고 있는 지구의는 인간 세상을, 그 위 십자가는 세상 죄에 대한 구세주의 승리를 나타낸다. 아울러 부조 왼쪽부터 사자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사자 함성에 비유하면서 복음서를 시작한 마르꼬를, 독수리는 솟구치는 영감을 글로 담은 사도 요한, 날개달린 남자는 복음서 첫머리에 예수 족보를 추적하고 있는 마태오, 그리고 황소는 주의 제단에 놓은 즈가리야의 희생물을 연상시키는 루가를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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