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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가보고싶은 성당

[주교좌성당] 부산교구 중앙 성당

by 세포네 2005.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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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뒤로 용두산공원, 오른쪽으로 국제시장을 끼고 있는 중앙주교좌성당 전경. 6·25 전쟁 피난시절의 애환이 서려 있다. 
  2) 중앙본당 성가신용협동조합 차영도(요한) 수석감사가 신협운동 창시자 메리 가별 수녀의 사진을 들고 신협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일본 절터에 세운 부산 복음화의 '모태'
부산교구는 2개 주교좌성당을 갖고 있다. 1957년에 지정된 중앙본당(중구 대청동 1가 48번지)이 날로 성장하는 교구의 전례와 행사를 수용하기에 벅차자 1992년 신시가지에 있는 남천동본당(수영구 남천1동 69의 1번지)을 추가로 지정했다. 중앙본당이 교구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다면, 남천본당은 21세기 도약을 이끌 주교좌성당이라고 말할 수 있다.

6·25 전쟁 때 부산에서 피난민생활을 했던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지금도 부산 중앙성당에 얽힌 아련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전국에서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1·4 후퇴 때 함경도 피난민들까지 미군함정을 타고 부산항에 도착하자 국제시장 바로 옆에 있는 중앙성당은 ‘콩나물 시루’가 됐다. 얼마나 소란스러웠던지 국제시장의 그때 이름이 ‘도떼기 시장’이었다. 그러니 성당이라고 조용할 리가 없었다.

밤이 되면 군 막사마냥 성당마루에 모포가 줄지어 깔리고, 식사 때가 가까워오면 성당 전체가 취사장으로 변했다. 또 수녀와 신자들이 강냉이죽을 쑤어 밥 굶는 전쟁 고아들에게 퍼 나르느라 하루 종일 북새통을 이뤘다.

하루 양식을 구하기 위해 시장바닥을 헤매던 가장(家長)이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올라가 담배 한대 물고 시름을 덜던 곳이 중앙성당이다.

사목자와 신자들은 피난민 뒷바라지를 하느라 고달팠지만 덕분에 부산 시민들과 피난민들 사이에서 천주교 하면 중앙성당으로 통할 만큼 명성이 자자했다.

중앙본당과 6.25 전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다. 대부분의 교회가 전쟁의 포화 속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중앙본당은 오히려 비약적 발전을 이뤘다. 부산의 도심 1번가에 위치한 본당답게 난민구호사업의 선봉에 선 덕분이다.

부산교회사연구소장 송기인 신부는 “피난시절의 중앙성당은 한국교회의 어머니 품이었다”며 “중앙성당의 난민구호활동은 부산교구 탄생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반세기 세월이 흘렀다. 지금 중앙주교좌본당(주임 권지호 신부)에서 그 시절의 흔적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당 건물도 1973년에 새로 지어졌다. 더욱이 1997년에 교구청이 수영구 남천동으로 옮겨감에 따라 교구 사목행정의 중심축도 신시가지 쪽으로 많이 넘어간 상태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산 복음화의 모태(母胎)인 역사적 가치와 반세기 넘게 쌓아온 신앙적 전통만큼은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없다. 모름지기 사회건 교회건 역사가 바탕이 되고, 전통이 뼈대가 되어야 제대로 발전하는 법이다.

중앙본당은 1948년 부산시내에서 3번째로 설립됐다. 8.15 해방 직후만 해도 부산시내에는 부산본당(현 범일동본당)과 청학동본당 밖에 없을 만큼 교세가 미약했다. 일본 식민통치 시절, 부산시내를 점령하다시피 한 일본인들이 천주교를 극심하게 탄압했기 때문이다.

중앙성당 터가 일본 불교 정토종파의 지은사(智恩寺)였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사람들이 해방 후 일본인이 떠난 이 사찰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툼을 벌이자 경남 관리재무국은 이를 포교용으로 천주교에 불하했다.

이때 범일본당 정재석 신부가 일본도를 휘두르는 불법 거주자들의 횡포에 맞서 성당부지를 지켜낸 일이 무용담처럼 회자됐다.

당시 관할구역은 북으로 초량에서부터 남으로는 영도구 신선동, 서쪽은 서구 하단동에 이를 만큼 넓었다. 신자수는 5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메리놀회 선교사들과 함께 진료소를 열고 구호활동을 벌여나가면서 교세를 키워 초량본당·신선본당·서대신본당 등을 차례로 분리시켰다. 중앙본당 최고 전성기는 아마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중앙본당은 또 한국신용협조합의 발상지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호사업과 전쟁 미망인 지원사업에 전념하던 메리 가별(메리놀수녀회) 수녀는 “한국 국민을 구하는 길은 구호품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라며 1960년 수녀원 ‘나자렛의 집’에서 성가신용협동조합이라는 한국 최초의 신협을 창립했다.

2002년말 현재 전국 조합수 1280개, 자산 21조원의 신협은 바로 여기에서 가지를 뻗어나갔다.

중앙본당이 본당들을 분리한 역사를 살펴보면 이 본당이 부산교구의 모태(母胎)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초장·송도·동대신·영주본당 등이 모두 이곳에서 분리 신설됐다.

이 성당을 신시가지에 들어선 새 성당들과 비교하면 마치 자식들 키워 출가시키고 얼굴에 세월의 흔적만 남은 우리네 어머니를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서울의 명동성당처럼 1970년대 말부터는 부산지역 민주화항쟁의 보루 역할을 했다. 그 무렵 신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수교회’라는 단체가 민주인사들을 초청해 시민강연회를 7차례나 열었다. 강연회는 야외에 스피커를 설치해야 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스테인드글라스가 눈부시다. ‘천지창조’ ‘열 처녀의 비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등 신구약 성서의 주요 사건이 추상화기법의 컬러 유리화로 집대성되어 있어 여유를 갖고 감상해볼 만하다.

유리화 설치공사는 신자들의 공사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1985년부터 10년 동안 서서히 진행됐다. 대형 작품은 오스트리아 슈발리에흑 수도원의 공방 책임자 루가씨가 만들고, 그 밖의 작은 창문공사는 조규석(요한)씨가 맡았다.

성당 종탑 벽면에는 십자가가 3개 걸려 있는데 이는 성당 주보 ‘성 십자가’를 상징한다. 지금은 용두산공원 전망대 때문에 이 종탑이 높다는 느낌이 들지 않지만 1973년 준공 무렵에는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명물이었다.

홍보분과장 정용인(후베르또, 45)씨는 “국제시장의 신자 상인들은 신시가지 아파트로 이사를 갔는데도 성당에 교적을 놔두고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며 “상업지역 특성상 주일학교 학생수는 적지만 2000차 주회를 한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이 8개가 넘을 정도로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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