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모으고 있는 형상의 대흥동성당 전경. 62년 완공 당시 대전 시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화제거리가 됐던 대흥동성당은 고딕양식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 대흥동성당 정면 현관 위를 장식한 12사도상. 왼쪽 6사도는 고 이남규 교수가, 오른쪽 6사도는 최종태 교수가 조각했다.
3. 성당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14처 부조와 베네딕도회 수사가 14처 부조를 중심으로 벽에 그린 그림.
4. 1964년 한국천주교 전래 180주년 기념으로 이남규 교수가 제작한 성모상.
하늘 향해 두손 모은 '기도의 집', 1962년 대전서 가장 높은 건물로 완공
대전 지역 천주교의 중심지인 대전교구 주교좌 대흥동성당은 시내 중심지에 위치해 시민들에게도 친숙하다. 신도시의 발전으로 이제는 이 지역이 구도시로 바뀌어 가고 있지만 시민들과 함께 하는 장소로 대전 지역 천주교의 대표성을 지닌 것은 변함 없다.
1962년 성당 건물을 완공할 당시 대전 시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화제가 됐던 대흥동성당은 60년대를 지나 70년대까지만 해도 시내 어느 곳에서나 보이는 건물이었다.
특히 당시 교회 건축물들이 고딕 양식의 적벽돌 구조가 주를 이루던 것과는 달리 시멘트 벽돌을 사용해 마감하고 현대적 디자인으로 기존의 개념을 탈피한 것이 대흥동성당 건물의 특징이다.
당시 거대한 성당 내부에 기둥 하나 없이 건축한 것은 건축사적으로도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모으고 있는 형상의 성당건물은 고딕 양식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는 평가다.
대흥동성당이 중구 대흥동 189번지 현 위치에 자리잡은 것은 1945년 10월7일이다. 이 자리는 1937년 대전에 진출한 작은형제회가 유치원을 운영하던 곳이었다. 1944년 목동에 위치한 ‘대전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오기선 신부는 해방 후 시내에 가까운 이곳으로 본당을 옮기고 목동에 있던 성당은 프란치스코수도회(현 작은 형제회)에 맡겼다.
대흥동성당은 처음에는 유치원 목조 건물 강당을 성당으로 사용했다. 6·25때 피난민들의 임시 수용소로도 사용했던 이 강당은 그러나 6·25를 거치며 폭격을 맞아 잿더미로 변해버려 1952년 12월 87평 규모의 임시 성당을 건축했다.
하지만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성탄이나 부활 때는 장소를 시청, 도청 강당 등으로 옮겨 대축일 미사를 봉헌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대전교구가 감목대리구로 설정된 지 10년만인 1958년 대목구로 정식 설정되면서 교구의 크고 작은 행사를 치르기에는 이 임시 성당이 너무 비좁아 오 신부는 당시 대목구장 원형근 라리보 주교와 논의를 거듭한 끝에 대성당 건립을 결정했다.
1960년 성당 건축기공식을 갖고 기초공사를 겨우 마쳤을 때 시공업자 사이에 시비가 벌어졌다. 그래서 이 공사는 없던 일로 하고 다른 건축업자와 새로 계약을 해 1962년 3월 10일 다시 기공식을 가졌다.
공사 중에 서울의 노기남 대주교가 대전에 내려왔다. “도대체 성당을 얼마나 크게 짓느냐”는 노 주교의 말에 오 신부는 “명동대성당보다 더 큰, 한국에서 제일 큰 성당을 짓는다”고 자랑했다.
명동성당 건축규모는 길이 68m, 폭 29m, 종탑높이 47m, 연면적 612평이다. 그런데 오 신부는 명동성당 규모를 423평으로 계산해 대흥동성당 규모는 이보다 100평이 더 넓다고 보았다. 오 신부의 저서 「순교자들의 요람을 찾아서」에는 대흥동성당 건축 규모가 길이 273척(82m), 폭 73척(22m), 종탑높이 130척(40m), 연면적 524평으로 나와 있다.
성당 설계는 이창근(돈보스코)씨가 맡아 설계도와 투시도를 로마 인류복음화성에도 보냈다. 그런데 당시로서는 거대한 성당 내부에 기둥하나 없이 건축하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어서 이런 건축을 처음 해본 설계자와 같이 현장감독을 한 오 신부는 노심초사하며 기도했다.
무사히 이 공사 과정을 마치자 오 신부는 성당 위 아래층을 오르내리며 “됐다, 됐다”를 외쳤다.
그러나 큰 공사에는 말이 많은 법이다. 사제들은 “요것은 요렇게 했으면…저것은 저렇게…”하면서 입을 댔다. 오 신부는 참다 못해 “성당을 망쳐도 내가 망치고 제대로 지어도 내가 할 테니 자아, 그만들 두시지. 이거 사람 미치기 똑 알맞습니다. 그만들 하시라구요.”(오 신부의 「순교자들의 요람을 찾아서」) 하면서 딱 잘라버렸지만 그래도 잔소리는 계속됐다. 공사가 진행되면서 높이 올라간 종탑을 보러 온 구경꾼들은 현기증이 난다며 한마디씩 했다.
드디어 공사 9개월만인 1962년 12월30일 성당이 완공됐다. 완공에 앞서 새 성당에서 봉헌된 24일 성탄 자정 미사에는 3500명이나 참례했다. 유도순(루가)씨 부부가 기증해 프랑스에서 주문해온 세개의 종이 내는 도, 미, 솔의 아름다운 화음이 지역 사회에 울려 퍼져 나갔다.
성당 봉헌식은 1963년 5월1일 전국에서 모인 사제 200여명과 수도자 150명을 비롯해 신자, 지역민 등 4000여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대흥동성당 정면 현관 위에는 12사도 부조상이 있다. 좁고 길게 뻗은 수직 기둥 사이사이를 장식하고 있는 이 12사도 부조는 성당 앞을 지나다녀도 관심있게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이 12사도 부조는 94년 작고한 이남규(루가, 공주사대 교수 역임) 교수와 서울대 미대 명예교수이자 한국가톨릭미술가협회장인 최종태(요셉) 교수의 공동 작품이다. 이 교수가 왼쪽 6사도 부조를, 최 교수가 오른쪽 6사도 부조를 조각했다. 국내를 대표하는 두 작가는 이 부조를 조각할 당시만 해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젊은 작가였다.
대흥동본당이 1960년대 초반 성당 건축 당시 넓은 내부 공간에 기둥 하나 없이 건축한 것 외에 이렇게 젊은 작가를 등용한 점도 파격적 일이었다.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낸 장발 선생과 친분이 있던 오기선 신부는 미술에 대한 관심이 커 그의 제자인 나와 1년 선배인 이 교수에게 작품을 부탁했어요. 성당을 건축하면서 미대를 갓 졸업한 무명의 젊은 작가인 우리를 과감하게 등용한 것은 큰 모험이었지요.”
최종태 교수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작품 비용은 받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고마웠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한복 입은 성모상과 요셉상도 제작했다며 “당시 한복 입은 성모상이 너무 낯설었던지 본당 사목회에서 말이 많았지만 오 신부가 사목회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 성모상을 성당 앞쪽에 세우고 요셉상은 제단 위쪽에 세웠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금은 이 성모상과 요셉상이 보이지 않는다.
성당내부는 정면 제대를 제외한 나머지 벽면을 제법 큰 규모의 14처 부조로 장식하고 있다. 한 처의 크기가 장정 8명이 간신히 들 수 있었다는 이 14처 부조는 이남규 교수가 제작했으며 최 교수도 도왔다.
1970년대에는 이 14처 부조가 있는 벽면마다 베네딕도회 수사 신부가 그림을 그려 벽면 전체를 그림으로 장식한 적도 있다. 그러나 현란한(?) 색상의 벽면 그림들로 인해 성당 내부 분위기가 너무 달라지자 1처와 14처 그림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시 지웠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1985년까지 있었던 제대 뒷부분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됐다. 역시 이 교수의 작품이었다. 이 스테인드글라스와 각이 진 측면 유리를 통해 성당 내부는 간접 채광을 받아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냈으며 제대 부근 중앙에는 십자 고상이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제대 주변은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제대 뒤쪽 벽은 모두 나무로 장식했으며 그 가운데 십자가가 있다.
이 교수는 성당 마당에 세워진 성모상도 제작했다. 한국천주교 전래 180주년 기념으로 1964년 제작한 이 성모상은 3m 남짓의 큰 크기로 성당 규모가 커 거기에 맞추다 보니 커졌다는 것이다. 이 성모상은 좌우 대칭 균형이 맞고 멋스런 기존의 성모상과 달리 하중이 앞으로 쏠리고 좌우 균형이 맞지 않으며 표정마저 얼굴선이 강하고 약간은 우울해 보인다.
그렇지만 본당 신자들은 한국적인 이 성모상에 정이 들어 있고 기도를 통해 많은 은덕을 입었다며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본당주임 박재만 신부는 전했다.
대흥동본당은 성당 앞 도로에 1997년께 지하상가 건설로 수로가 바뀌면서 성당 건물 앞부분에 금이 가고 마당이 약간 가라앉는 등 영향을 받기도 했다. 3년 전 성당 전체를 수리하면서 정면 유리화는 다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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