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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성서의인물(구약)

[9] 소심하고 겁많은 이사악

by 세포네 2005. 6. 2.

 

아버지 아브라함의 장례를 치른 이사악은 깊은 상념에 잠겼다. 이사악은 이미 불혹을 넘긴 나이였다. 그러나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를 여읜 이사악은 마치 세상에 의지할 마지막 끈이 끊어진 비통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사악의 삶에 있어서 아버지 아브라함은 너무나 큰 존재였다. 어찌보면 부담스럽고 힘겨운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이사악은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늦둥이로 태어났다. 아브라함 부부는 아들을 끔찍히 귀여워했을 것이다. 마치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손녀를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떻게 보면 과보호와 지나친 사랑 속에 성장했을 것이다.
이사악에게 있어, 아버지를 생각할 때 가장 깊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무엇보다 아버지가 자신을 번제물로 바치려했던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사악은 소심한 성격이었다. 아버지 아브라함과는 정반대의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 했던 날, 아버지는 아들에게 큰 나뭇짐을 지고 산으로 올라가게 했다. 집을 떠난 지 사흘 만의 일이었다. 아브라함은 사흘 내내 말도 없이 깊은 시름에 빠진 듯이 침통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이사악은 아버지에게 쉽게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아브라함과 둘이서 산위로 올라갈 때 비로소 질문을 던졌다.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양은 어디있습니까?” 정말 이사악은 아무런 눈치를 채지 못했을까?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아버지께 물어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사악은 소심한 성격으로 불만이나 생각을 마음속에 묻어두고 살았을 가능성이 더 많다. 아버지 아브라함의 성격은 결단력이 있고 외향적이었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인물이었다.

그 반면에 부모의 귀여움과 보호 속에 자랐던 이사악은 내성적이고 소심했던 것 같다.

아버지께 불만이 있어도 드러내놓고 표현하지 못할 그런 인물이었다. 대개 이런 경우의 아들은 아버지께 내적으로 불만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 자신이 억눌리는 것에 대한 심리적 반발감이라 할까. 그래서였을까. 이사악은 나중에 아들 중에서도 조용하고 꾀 많은 야곱보다는 사나이같은 에사오를 더 좋아했다.

어쨌든 이사악은 아버지가 자신을 칼로 찌르려고 했을 때 그것을 밀치고 도망갈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감히 아버지의 뜻을 거부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이사악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제물로 쓰기 위해 죽인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이사악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크고 두려운 존재였을 것이다.

이사악의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은 나중에 불레셋 사람들과 그랄의 목자들의 다툼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사악이 그랄 지방에 머물며 살게 되었다. 자신의 아내 리브가가 너무 예뻐서 혹시 아내를 차지하려고 그곳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 겁에 질려 있었다. “저 예쁜 여인은 누구요?”

그곳 사람들이 묻자 이사악은 “내 누이동생이요…”하고 대답했다. 부전자전이라 했던가. 아버지와 똑같이 부인이 누이동생이라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이사악은 그랄땅에서 농사를 지어 큰 수확을 내고 점점 부자가 되었다. 그러자 불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였다.

불레셋 사람들은 이사악에게 우물을 흙으로 메우고 그곳을 떠나라고 협박했다. 그러자 이사악은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천막을 치고 우물을 팠다. 이번에도 그랄의 목자들이 몰려와 자신들의 우물이라 우겼다. 이사악의 종들이 “주인님, 어떡할까요. 저 사람들이 몰려와 싸움을 걸고 생떼를 부립니다. 한판 붙을까요?”하고 물었을 것이다. 이사악은 “아니다. 우리가 다른 데로 가자. 괜히 싸워서 시끄러워지면 좋을 게 없다”라며 싸움을 회피했다. 사막 생활에서 생명과도 같은 우물을 여러 차례 양보했었다. 분명히 이사악은 아버지의 성격과는 판이하게 다른 면이 있었다.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 이사악은 큰 슬픔에 잠겼지만, 한편 자유로운 해방감도 느꼈을지 모른다. 자의든 타의든 이사악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신앙적인 면에서는 더 많았을 것이다.

이사악은 평범하고 특징이 별로 없는, 소심하고 겁 많고 내성적이며 다툼을 싫어하는 보통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면 하느님의 역사(役事)는 이러한 보통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피해를 당하고 상처를 받으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수많은 착한 사람, 바로 우리 자신들이며 이사악의 모습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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