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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성당건축이야기

42. 생드니 대성전 (중)

by 세포네 2023.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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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와 빛에 대한 쉬제르의 영감, 새로운 고딕 건축 창조

생드니 대성전의 제단 주변. 출처=sah.org

생드니 대수도원 부속 성당 증·개축 이어져

고딕 대성당은 파리 교외의 생드니 대수도원 부속 성당에서 탄생했다. 이때 수도원장 쉬제르가 착수한 것은 신축공사가 아니었다. 카롤링 왕조에 지어진 성당은 775년에 확장되었고(평면도의 가운데 빗금 친 작은 성당), 832년에는 반원 제단 동쪽에 증축된 바 있는(작은 성당 반원 제단의 오른쪽에 덧붙인 부분) 유서 깊은 성당을 다시 증·개축하는 공사였다. 요새 용어로 리노베이션 공사다. 그러나 이 공사는 그야말로 새로운 양식을 낳은 혁신적인 프로젝트였다.

쉬제르는 서쪽 정면과 동쪽 제단부를 개축했다. 그사이의 회중석은 쉬제르가 죽은 이후인 1231년에 유명한 피에르 드 몽트뢰유(Pierre de Montreuil)에 의해 또다시 재건되었다. 다시 쉬제르의 제단은 개축되었고, 회중석과 좌우 수랑(袖廊)이 새로 건설되어 최종적으로 1281년에 헌당되었다.

쉬제르가 이런 개축 공사를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중세에 증가하는 도시 인구에 따라 신자가 넘쳐날 정도로 옛 성당이 좁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개축한 이유를 “단 한 가지 부족했던 것은 적당한 크기를 갖지 못한 것이었다”, “성인들의 도움을 구하고자 늘어난 신자들이 자주 모여왔는데도, 너무나도 협소한 이 바실리카는 언제나 이런 불편함을 심각하게 버티고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신자가 왔을까 하겠지만, 생드니 대수도원은 파리 중심부인 시테섬에서 북으로 10㎞ 정도 떨어져 있어서 축일에 걸어서도 2~3시간이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역대 프랑스 왕이 묻혀 있어서 성당을 재건하는 데에는 특별한 고려가 필요했다.

생드니 대성전의 평면 변화. 출처=employees.oneonta.edu

경당 깊이 얕게 함으로써 높이와 빛 통합

1137년 쉬제르는 먼저 회중석으로 연장하여 문랑을 확대하고 서쪽 정면을 34m로 넓힌 것을 1140년 6월 9일 완성했다.(평면도 왼쪽 끝의 진한 부분) 본래는 문이 하나였는데 세 개의 포털로 확장되었다. 세 개의 포털은 각각 중랑과 측랑의 너비를 보여준다. 각 포털 위에 있는 아치형 창문 아케이드는 장식 요소가 외관 전체의 통일성을 더해주었다. 탑 두 개가 계획되었는데, 북쪽 탑은 세 차례의 토네이도의 영향을 받아 1846년 무너진 채로 있다. 그러나 이 서쪽 정면 자체는 혁신적이지 못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생드니 수도원 부속 성당의 내부는 측랑이 있는 중랑, 평평한 천장, 반원 제단을 둔 매우 소박한 성당으로 아마도 로마의 초기 그리스도교 대성전인 산타 사비나와 비슷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어서 하느님 백성에게 힘 있게 말하는 더없는 영광의 제단을 창조하기 위해 제단을 증축했다. 동쪽 제단 부분(평면도 오른쪽 끝의 진한 선 부분, 이런 프랑스 고딕 성당의 동쪽 끝을 ‘슈베 chevet’라고 한다)을 새로운 건축 기술로 개축하고 3년 3개월 만인 1144년 6월 14일이 헌당함으로써 고딕 건축을 결정적으로 창조했다.

증축된 반원 제단은 7개의 베이로 나뉘며, 그 바깥쪽에는 2중의 주보랑이 둘러 있다. 이렇게 해서 제단부는 두 배로 늘어났고 천장 높이도 28m로 높였으며, 바깥 주보랑에는 7개의 경당이 방사하며 열려 있다. 재건축 이전에는 방사형으로 뻗어 나가는 작은 경당이 두꺼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으로 분리되어 있어 무겁고 어두웠다. 그러나 경당의 깊이가 얕고, 그 경당을 덮는 볼트도 주보랑과 융합하고 있어서 마치 두 번째 주보랑이 밖으로 둥글게 내민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경당의 깊이를 얕게 함으로써 높이와 빛을 통합하고 순례자의 동선을 위해 이중 행렬 보행로를 만들었다. 이로써 문랑과 마찬가지로 제단도 옛 중랑의 폭에 비해 꽤 커서 전체적으로는 머리가 큰 모습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만든 ‘슈베’는 그리스도의 가시면류관으로 상징해 주었다.

생드니 대성전의 제단. 출처=worldhistory.org

리브 볼트·첨두아치로 전혀 다른 공간 완성

생드니 대성전은 기존 건물과 신축 부분의 융합을 세심하게 배려했다. 로마네스크 성당에서는 지하 경당이 마련되어 그곳에 유해나 유물을 안치하고, 그 위에 제단을 두는 것이 통례였고 제단은 회중석보다 바닥이 높았다. 이와는 달리 고딕 성당에서는 공간을 일체화하고자 점차 지하 경당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생드니에서는 카롤링 왕조의 지하 경당을 이어받은 채로 개조했기 때문에 제단과 중랑의 바닥 레벨의 차는 크고, 따라서 제단과 회중석은 격리되어 있다. 이렇게 개축된 제단에 관하여 쉬제르는 “상부의 기둥과 그것들을 잇는 아치가 하부의 지하 경당의 기둥 위에 놓였다”고 말했다.

새로이 창안된 제단부 공간은 경쾌하다. 그런데 이 경쾌함을 강조하는 것은 두 개의 주보랑을 구획하며 그 위로 첨두아치가 가볍게 위로 뻗어 오르는 우아한 대리석 원기둥 열이다. 쉬제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궁전이나 목욕탕 유적에서 원기둥을 배로 수송해 와 옛 회중석과 경계를 이루는 새로운 제단을 짓고자 했다. 쉬제르가 카롤링 왕조 8세기의 건물을 7세기 메로빙거 왕조의 것으로 잘못 알아 400년인데도 500년 이상 이전에 건설되었다고 했으나, “옛 건물과 새 건물의 적합성과 일관성”으로 “더 크게 통합된 전체 속에 들어오게” 했다. 그는 카롤링 왕조의 성당 안에 늘어서 있던 대리석의 원기둥 열을 “변화가 풍부한 칭찬을 받아 마땅한 대리석 원기둥”이라고 건설기록에 적을 정도로, 고대와 동등한 시대에 지어진 성당과 조화하는 리노베이션을 원했다.


생드니 대성전의 주보랑. 출처=winthisfalsworld.blogspot.com

이때 쉬제르는 그가 잘못 알았던 “메로빙거 왕조 시대의” 벽 일부를 중요한 역사적 유물로서 ‘보존’하고자 했다. 옛 전승에 의하면 이 벽은 다고베르 왕조 시절 건설이 한창일 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어 “안수하며… 성별하셨다”고 한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의 벽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학술적으로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쉬제르는 “이 거룩한 석재 자체에 경의를 드리고”, “옛 벽 일부를 될 수 있는 한 남겼다”고 말하고 있다.

시선은 이 비현실적인 내부에 끌리면서 주보랑을 걷게 된다. 그러면 깊이가 얕은 경당의 벽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하면서 사람들의 움직임에 절도 있는 리듬으로 대응해 준다. 그 결과 리브 볼트와 첨두아치를 기본 요소로 하며 가볍고 완만한 운동감이 있는 전혀 다른 공간을 완성해 주었다. 이때 볼트에 리브가 없었더라면 내부 공간은 이보다는 무겁고 불안정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주보랑과 경당의 복잡한 볼트는 리브가 교차하는 중심(重心)에 보스(boss)라는 장식을 둠으로써 더욱 완성된 모습을 갖추었다.

여기서 함께 주목해야 할 것은 주보랑의 리브 볼트나 벽기둥이 완전히 고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당을 지나 관통하는 바깥 주보랑 벽에는 눈부신 스테인드글라스를 끼운 커다란 창이 있다. 다시 말해 우회하는 측랑을 가진 긴 다각형 통로에 바닥까지 내려온 커다란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이끄는 참으로 놀라운 조망으로 가득 차 있다. 회중석에서 보면 동쪽 제단부는 리브 볼트 천장이 높은 위치에서 서로 결합하며 그 경계를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지배하고 있다. 그야말로 과감한 혁신과 신비한 상징의 통합이었는데, 이에는 높이와 빛에 대한 쉬제르와 그의 석공들의 영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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